“인공지능(AI)·GPT 등 디지털 세계와 바이오·헬스케어 등 생물학적 세계가 융합하면서 새로운 생태계가 열리고 있습니다. 한국도 생태계 구축에 참여해야 합니다.”
수브라 수레시 휴렛팩커드(HP) 이사회 의장은 31일 서울 광장동 그랜드&비스타워커힐호텔에서 개막한 ‘서울포럼 2023’ 기조강연에서 “코로나19는 기회이자 위기였다. 이 기간 바이오 업계의 혁신 속도가 빨라지면서 과학기술과 융합에도 속도가 붙어 바이오·헬스케어에 새로운 트렌드가 만들어지고 있다”며 이같이 강조했다.
인도 뭄바이에서 태어난 그는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매사추세츠공대(MIT)에서 2년 만에 박사 학위를 받을 정도로 천재성을 인정받았다. MIT 학장, 카네기멜런대 총장, 세계 최대 규모의 연구 지원 재단인 미국 국립과학재단(NSF) 총재 등을 역임하며 언제나 ‘아시아계 최초’라는 수식어를 달았다. 기술·학문 간 융합 분야의 최전선에서 활동하고 있는 그는 “코로나19로 줌과 같은 플랫폼이 확산되는 등 기술 채택이 가속화됐고 대학·연구기관의 연구가 전 세계 인구에 적용되며 영향력을 입증했다”며 “이와 동시에 국가 간, 사람 간에 의료 접근의 불평등이 커지는 계기가 되고 전 세계 대중이 과학에 대해 불신을 갖게 됐다”고 지적했다. 이 같은 상황에서 한국이 첨단바이오 분야의 위기는 피하되 기회를 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첨단바이오·헬스케어 분야에서 시장을 뒤흔들 ‘파괴적 기술’로 그는 모바일인터넷, 클라우드, 차세대 유전체학, 첨단 소재, AI, GPT, 로보틱스, 3D프린팅, 실시간 컴퓨팅 시뮬레이션, 만물인터넷(Internet of Everything) 등 10대 기술을 지목했다. 이들 기술이 인류와 연결되고 윤리·정치와 상호 작용하면서 융합적 사고로 이어져 첨단바이오 산업을 이끄는 새로운 시대를 연다는 의미다. 실제로 AI·빅데이터·딥러닝 기술 등은 바이오·헬스케어 분야에서 빠르게 적용되고 있다. 방대한 데이터를 빠르게 처리해 성공 가능성이 높은 신약 후보 물질을 추려내고 원격의료 서비스의 상용화도 앞당겼다. 기술 발전의 빠른 속도를 감안할 때 더 다양한 분야에서 시너지 효과가 나올 것으로 점쳐진다.
수레시 의장은 이러한 사례로 당뇨병 환자를 대상으로 한 협업 프로젝트를 제시했다. 이 프로젝트는 반도체 기술을 활용해 당뇨병 환자의 안구에서 혈류의 속도·압력을 통제하고 여기에 AI·머신러닝 등을 도입해 진단도구까지 개발하고 있다. 과학기술이 의학 발전을 가속화하는 것이다.
그는 또 한국이 첨단바이오 분야에서 미국·유럽 등 선진국에 비해 늦게 출발했으나 디지털 기술 등에 4차 산업혁명의 기술을 적극적으로 개발·수용해온 만큼 더 큰 기회가 열려 있을 것으로 내다봤다. 수레시 의장은 “한국은 기술에 능통하고 교육을 받은 인력이 많으며 반도체 기술력이 우수한 점 등이 바이오 역량을 개발하는 데 우호적인 측면으로 작용한다”고 설명했다.
다만 첨단바이오 기술 발달로 불평등이 심화하거나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낳을 수 있는 점 등은 한국도 고려해야 할 지점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이날 기조강연에서 2019년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한 의사가 로봇의 스크린을 통해 암 환자에게 1주일 내 죽을 것이라고 알려줘 논란이 됐다는 내용의 기사를 소개했다. 당시 의사는 로봇의 스크린을 통해 78세 환자에게 “더 이상 남은 폐가 없다”며 “죽을 때까지 모르핀 주사를 놓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전했다. 환자 가족은 죽음을 앞둔 사람에게 절망을 주는 말이라며 분노했다. 의학기술 발전이 의사와 환자 간 상호작용을 완전히 대체한 것이다. 수레시 의장은 “인간의 존재를 정의하고 기계가 인간의 편견을 악화시키지 않는지 한국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며 “기술 발전이 일자리를 창출하거나 오히려 일자리를 줄일 수도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한국이 첨단바이오 분야에서 성공적으로 생태계를 구축하기 위한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 그는 “한국도 잘못된 정보를 가려내도록 훈련하고 책임 있는 혁신을 추구해나가야 한다”며 “민관 파트너십을 통한 지속적인 배움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아울러 정보기술을 이해하고 정보를 활용해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능력인 디지털리터러시를 키우고 지속 가능성을 중시하는 사회를 조성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MIT에서는 인류학이든 영어학이든 학생의 전공에 상관없이 디지털리터러시의 최소 요건을 갖추도록 요구한다”며 “바이오와 의학을 모두 잘 아는 공학자를 양성할 때 사회과학·인문학 교육이 매우 강조된다”고 힘줘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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