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간 1745억 원 상당의 적자를 내며 폐원 기로에 놓인 서울백병원의 운명이 오늘(20일) 판가름 날 전망이다. 병원 측은 누적적자가 눈덩이처럼 불어가고 있어 폐원이 불가피하다는 입장이지만, 필수의료 공백 우려가 나날이 커지는 상황에서 도심 한복판에 80년 넘게 자리 잡았던 병원이 문을 닫는 데 대해 반대 목소리도 적지 않다.
20일 의료계 등에 따르면 학교법인 인제학원은 이날 오후 3시 서울 중구 서울백병원 건물에서 이사회를 열고 '경영정상화 TF'가 이달 초 제안한 서울백병원 폐원안을 의결할 계획이다.
폐원안이 의결되면 1941년 '백인제외과병원'이라는 이름으로 문을 열어 82년간 자리를 지켰던 서울백병원이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법인 측은 지난 2004년 이후 20년간 누적된 적자가 1745억원에 달해 더 이상 운영이 어렵다는 입장이다.
서울백병원은 도심 공동화로 주변 거주 인구가 줄어들고 건물이 노후화되면서 적자에 허덕인지 오래다. 병원 측은 2016년부터 경영정상화 태스크포스(TF)를 운영하며 경영난 타개를 위해 힘써 왔다. 2017년 기준 276개였던 병상수를 122개까지 줄이고, 인건비를 줄이기 위해 인턴 수련병원으로 전환해 전공의(레지던트)를 받지 않았다. 병동을 리모델링하고 매년 30억~50억 원씩 투자하는 등의 자구노력을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요양병원, 건강검진시설, 전문병원 등으로 전환하는 방안 등을 놓고 외부업체의 컨설팅까지 받았지만 현 건물로는 적자를 벗어나기 힘들다는 결론에 도달하면서 이를 이사회 안건으로 올리기로 결정한 상태다.
병원 측에 따르면 현재 서울백병원에는 비정규직을 포함해 400명에 가까운 인원이 근무하고 있다. 학교법인 인제학원은 서울백병원이 폐원하더라도 법인 내 다른 병원을 통해 직원 고용을 승계하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인제학원은 서울백병원 외에도 상계·일산·부산·해운대병원을 운영 중이다. 병원 관계자는 "이달 첫째주 이들 병원에 현 상황과 함께 이사회 결정에 따라 고용 승계가 필요할 수 있다는 점을 고지했다"며 "현재로선 구체적으로 정해진 바가 없다"고 말했다.
서울백병원이 폐원하면 지난 2008년 이대동대문병원, 2011년 중앙대 용산병원에 이어 서울 강북 도심 지역의 대학병원이 문을 닫는 사례가 재현된다. 앞서 지난 2019년에는 동대문구 제기동의 성바오로병원이, 2021년에는 중구 묵정동의 제일병원이 각각 폐원한 바 있다. 현재로선 이사회에서 결과가 뒤집힐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는 게 의료계 중론이다.
이런 상황에서 백병원 구성원과 시민사회를 중심으로 백병원 폐원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서울백병원 노조가 속한 전국보건의료산업노조는 지난 19일 서울백병원 본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폐원 계획을 철회하라"고 촉구했다. 이들은 이날 '서울백병원 폐원 저지 공동대책위원회'를 발족하고 "서울백병원은 감염병 전문병원으로 대규모 응급센터를 운영하고 있다"며 "폐원은 서울 도심의 필수의료 공백과 공공의료 기능 부재로 이어질 것"이란 입장을 내놨다. 공대위는 "경영상황에 대한 투명한 공개 없는 폐원은 졸속"이라며 "재단 측이 의료수익과 의료 외 수익이 얼마나 발생했는지, 코로나19 전담병원으로 손실보상금은 얼마나 받았는지, 학교법인은 경영정상화를 위해 얼마를 투자했는지 투명하게 공개하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폐원하면 393명 직원의 고용과 생존권은 직격탄을 맞게 될 것"이라며 "서울시 등 관계기관과 협의해 폐원을 대신할 합리적인 대안을 모색해야 한다"고도 덧붙였다.
서울백병원 교수협의회도 지난 12일 기자간담회를 열고 "경제적 이유만을 들어 폐원을 결정하고 환자와 교직원을 흔들려 해서는 안 된다"며 "병원 회생을 위한 대책을 마련해 교직원들과 대화할 것을 법인에 요구한다"고 밝혔다. 이날 조영규 교수협의회장은 "법인 측이 폐원시 교직원을 형제 병원으로 고용승계하겠다지만 이는 연쇄적인 경영 위기를 초래할 수 있다"며 "서울백병원이 어려움에 처한 것은 서울백병원을 키우지 않은 법인의 경영 전략 때문이지, 교직원 때문은 결코 아니다"라고 비판했다.
재단 측의 서울백병원 폐원 추진은 중구 저동의 서울백병원 부지가 명동 번화가 바로 앞에 위치해 상업적 가치가 크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더욱 논란을 키웠다. 교육부는 작년 6월 사립대 법인이 교육에 활용하지 않는 토지나 건물 등 유휴 교육용 기본재산을 수익용으로 용도 변경할 때 허가 기준을 완화하는 내용으로 '사립대학 기본재산 관리 안내' 지침을 개정한 바 있다. 지침 개정으로 서울백병원 부지가 상업용으로 활용할 수 있게 바뀌었는데, 부동산 가치가 2000억~3000억 원 수준으로 추산된다.
서울시, 중구 등 관할 지방자치단체는 당혹스럽다는 반응이다. 서울시 관계자는 "폐원시 취약계층 피해나 의료공백 발생 가능성은 없는지 살펴보고 있다. 어떤식으로 대처해야 할지 분석하면서 고민하는 중"이라며 "민간 의료기관이어서 서울시 입장에서는 지원금을 주면서 유도하기는 어려운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중구는 서울백병원 측에 지난 14일 '인제대학교 서울백병원 진료기능 유지 요청'이라는 제목의 공문을 보내 병원 운영을 계속할 것을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중구는 공문에서 "서울백병원은 소아청소년과와 중증환자 진료 등에서 필수의료 기능을 수행해왔고, 중구민의 생명을 보호하는 공공의료의 역할을 충실히 담당해왔다"며 "서울백병원이 중구민의 생명과 건강을 보호하는 역할을 함께 수행하기를 요청드린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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