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 관계가 ‘빙점’이다. 양국 관계는 미·중 전략경쟁의 영향을 깊이 받고 있다. 중국의 관심사인 북핵, 대만 문제, 한미동맹에 대한 양국의 인식 차이는 커지고 있으나, 윤석열 정부 출범 1년이 지나도록 한중정상회담의 모멘텀도 찾지 못하고 있다. 이 와중에 주한 중국대사의 이른바 ‘베팅’ 발언은 한국인의 감정선을 건드리면서 상황은 더욱 복잡해졌다. 더구나 이 발언이 위안스카이를 연상하게 한다는 윤석열 대통령의 언급은 일종의 가이드라인이 돼 정책 운신의 폭을 제약했다. 싱하이밍 대사를 외교적 기피 인물로 지정해 추방해야 한다는 날 선 주장도 등장했다. 중국도 한미관계나 한일관계에서 보여준 대담함을 한중관계에서 찾을 수 없다는 불만이 있고, 넘지 말아야 할 선을 이미 전달한 상황에서 먼저 손을 내밀어 문제해결에 나설 가능성도 크지 않다.
다행인 것은 예민해진 상황을 인식한 중국이 관망 모드로 전환하면서 확전을 자제하고 있고, 우리 정부 일각에서도 리스크를 관리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들리고 있다는 점이다. 사실 한중관계를 이대로 두기는 어렵다. 우선 대중국 무역적자가 늘고 있으나, 세계 최대 소비시장의 하나인 중국시장을 우회하는 것이 말처럼 쉽지 않다. 그리고 제7차 북핵실험 방지나 한반도 위기관리를 위해서도 한중 협력 필요성을 과소평가하기 어렵다. 더구나 서방은 대중국 디커플링 대신 디리스킹을 선택하고 다시 중국으로 눈을 돌리고 있지 않는가.
이런 점에서 지금 필요한 것은 서로의 바텀라인을 확인하는 것이다. 양국 모두 말 폭탄을 거두고 외교적 절제를 유지해야 한다. 중국이 ‘핵심이익의 핵심이익’으로 간주하는 대만 문제에 대해서도 우리가 ‘두 개의 중국’을 인정할 수 없다면, 적어도 한중 양자 대화에서는 “대만해협의 평화와 안정이 중요하며, 하나의 중국 입장을 일관되게 지지한다”는 등 범위를 설정할 필요가 있다. 중국도 북한외교에서 사라진 ‘한반도 비핵화’ 원칙을 일관되게 지지한다는 점을 환기하면서 북한의 핵보유국을 사실상 인정하고 있다는 외부의 시선을 불식시킬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한중관계를 천하관으로 보는 근본 인식도 바꿔야 한다. 또 하나는 한중관계를 국내정치에 활용하려는 유혹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사실 우리 국민의 대중국 비호감도가 80%를 넘는 상황에서 중국 때리기(China Bashing)만한 국내정치 카드도 없다. 이렇다 보니, 사안이 불거지면 정치권은 오직 지지층을 상대로 ‘조공외교’, ‘사대 외교’, ‘삼전도의 굴욕’이라는 말을 여과 없이 쏟아내거나, 중국과 ‘헤어질 결심’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눈을 돌려 세상 돌아가는 사정을 살펴보자. 미·중 갈등의 최전선에 있는 조 바이든 대통령은 양국관계에 해빙이 올 것이라고 여러 차례 밝혔고, 실제로 토니 블링컨 국무장관은 5년 만에 “갈등이 충돌로 비화하지 않으려면 지속적인 외교가 중요하다”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미·중 정상회담 분위기를 지폈다. 주중 미국 상공회의소 조사에 의하면 미국기업의 60%가 향후 대중투자를 늘리겠다고 했고, 실제로 JP모건, 테슬라, 세계최대 반도체 회사인 엔비디아 등 거대 글로벌기업 최고경영자(CEO)들이 속속 중국으로 달려가는 중이다. 재닛 옐런 미 재무장관도 미국 하원에 출석해 “디리스크? 맞다. 디커플링? 절대 아니다”는 점을 다시 환기했다.
한중관계에도 멈출 때, 건너갈 때, 기다릴 때를 알리는 신호등을 세우는 맞춤형 디리스킹이 필요하다. 정부는 정부대로 움직여야 하지만, 국회도 숙의와 협치에 기반을 둬 대중국 외교의 물꼬를 터야 한다. 여야의원 100여 명 이상이 함께 발족시킨 한중의원연맹을 통해 미래의제를 놓고 의원외교를 전개하는 것도 방법의 하나다. 중국에 ‘아니오’라는 결기를 보이는 것은 용기의 영역이지만, 앞을 알 수 없는 한중관계에 길을 내는 것은 지혜의 영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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