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킬러문항이 없어지는 대신 준킬러문항이 많아진다면 준킬러문항을 잘 준비해주는 학원을 가야죠.”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의 ‘킬러문항’을 없애겠다고 공언한 정부가 사교육 시장을 ‘카르텔’로 규정하고 단속을 예고했지만 강남을 대표로 하는 사교육 열기는 식을 줄 몰랐다. 킬러문항을 없애는 대신 변별력 확보를 위해 문항수 확대가 예상되는 준킬러 문항을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학원가를 찾는 학부모와 학생들의 발길은 계속되고 있다. 수능을 5개월 여 앞둔 정부의 킬러문항 배제 방침이 결국 또 사교육 시장의 필요성을 불러일으킨 ‘풍선효과’에 그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수능을 146일 앞둔 23일 대한민국 교육 1번지 서울 강남구 대치동 학원가는 그야말로 ‘혼돈’에 빠졌다. 특히 작년에 이어 또다시 수능에 도전하는 재수생들이 당황스러운 기색을 보였다. 자체 모의고사로 이름을 날리며 최근 급속한 성장세를 보인 입시학원 시대인재의 한 재수생 정 모(19) 양은 “수능이 얼마 안남은 시점에서 너무나 동요된다”며 “그동안 학원에서 제공하는 자체 콘텐츠로 고난도 문항에 대비해왔는데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답답해했다. 또 다른 재수종합학원인 강남대성의 재수생 김 모(20) 군도 “출제 기조를 바꾸려면 진작 공지했어야 한다”면서 “솔직히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한다”면서 얼굴을 붉혔다.
불안한 학부모들의 해결책은 결국 또 학원이었다. 대치동 일대에서는 다수의 학부모들이 학원을 돌며 입시설명회 ‘투어’를 하고 있었다. 이날 오후 학원 인근 카페는 입시 설명회 자료를 쌓아두고 시름 깊은 얼굴로 얘기를 나누는 학부모들로 붐볐다. 자율형 사립고등학교 중동고에 재학중인 고3 아들을 둔 한 학부모는 “설명회에서 킬러문항이 없어지고 상대적으로 쉬운 준킬러 문항이 다수 출제되면 결국 시간 내에 문제를 다 푸냐 못 푸냐의 싸움이 될 것이라고 들었다”며 “준킬러문항을 대비하기 위해 어느 학원이 나을지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날 입시설명회를 연 학원 측도 “예년에 비해 설명회에 온 학부모가 20~30% 정도 많았고 최근 전화 상담도 크게 늘었다”며 “어느 때보다 학부모들이 불안한 기색이 역력해 준킬러문항 대비에 대한 문의가 많다"고 말했다.
학생들 역시 학원 의존도를 줄이지 않겠다는 분위기다. 강남대성에서 재수를 준비 중인 성 모(20) 군은 “9월 모의평가를 봐야 감이 잡힐 것 같다”면서도 “어차피 학원 연구소에서 출제 동향을 파악해 자체 개발한 모의고사로 일주일에 2~3번을 시험을 치를 수 있을 만큼 양질의 문제가 충분히 제공되기에 학원에서 시키는 대로 따라갈 생각”이라고 말했다.
특히 내년과 내후년 수능을 앞둔 고등학교 1,2학년 학생들 사이에서는 등급을 가르는 고난도 문항이 사라지면 등급 컷이 올라가 변별력 없는 ‘물수능’이 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커지며 새로운 출제 기조를 대비해주는 학원으로 옮겨가려는 움직임도 포착됐다. 개포고 2학년 이 모(18) 양은 “애들 사이에선 벌써 1등급 없는 수능이 되는 것 아니냐는 말이 나온다”면서 “이 동네는 킬러문항 없어진다고 학원 안다닐 애들이 아니다”고 말했다. 경기여고 1학년 박 모(17) 양도 “학원에선 EBS 수능특강이 발간되기도 전에 그해 수능특강 예상문제를 만들어 준다”며 “어떻게 바뀌든 그것을 대비해주는 학원을 찾아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교육부가 22일부터 2주간 학원 과대·과장 광고 등에 대한 집중 신고 기간을 운영하는 등 대대적인 단속에 나서면서 학원가는 긴장한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이 같은 조치의 실효성에 대한 의문도 팽팽했다. 대치동의 한 학원 관계자는 “사교육에 종사하고 있지만 공교육 정상화 돼야한다는 기조에 충분히 공감한다”면서도 “대대적인 교육 개혁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 단순히 킬러문항 없애는 게 무슨 효과가 있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10년 넘게 대치동에서 학원을 운영했다는 50대 이 모 씨도 “이곳은 어떤 출제 기조든 ‘대비하지 않으면 뒤쳐진다’는 마케팅으로 어떻게 해서든지 학원생 유치를 지속해나갈 곳”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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