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부채를 관리하기 위한 재정준칙의 올 상반기 입법이 사실상 무산됐다. 국회 소관 상임위원회의 논의는 가까스로 재개됐지만 국가 재정에 뜬 경고등을 또다시 외면한 여야는 합의에 이르는 데 실패했다. 재정준칙 법제화가 4개월째 표류하면서 기획재정위원회가 올 상반기 본회의에서 실질적으로 처리한 법안은 단 3건에 그치는 등 초라한 입법 성적을 기록했다.
기재위는 27일 경제재정소위원회를 열고 재정준칙 법제화를 위한 국가재정법 개정안을 1번 안건으로 논의했다. 30개월 넘게 안건 목록에만 올린 채 입법 성과를 내지 못했다는 비판을 피하기 위해 가장 먼저 논의하기로 한 것이다.
개정안은 정부가 국내총생산(GDP) 대비 관리재정수지 적자 비율을 3% 이내로 관리하되 GDP 대비 국가채무비율이 60%를 초과할 때는 관리재정수지 적자 비율을 2% 이내로 관리하도록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팬데믹 등 위기 상황에는 예외를 두는 조항도 포함돼 있다. 야권에서 강조하는 ‘재정의 역할’을 담보하기 위해서다.
기재위는 2월부터 재정준칙 도입을 본격적으로 논의했지만 여야의 입장은 이날도 평행선을 달렸다. 여당은 지난 문재인 정부에서 국가채무가 416조 원 늘어난 만큼 지금이라도 재정 건전성 확보를 위한 조치가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더불어민주당에서는 내수 경제가 위기인 상황에서는 추가경정예산 등 부양책 논의가 병행돼야 한다는 의견이 나온 것으로 알려졌다. 여당 기재위 관계자는 “여야의 의견을 종합한 대안이 마련됐지만 정작 민주당이 재정준칙의 필요성에 대해 회의적 입장을 보이며 논의가 처음으로 되돌아갔다”고 말했다. 서영교 민주당 의원은 회의 도중 기자들과 만나 “나라의 부채도 줄이되 국민 부채도 줄이는 방안이 필요하지 않느냐”고 밝혔다.
여야의 주고받기식 법률안 협상도 법안 처리를 늦추는 요소다. 올 3월 회의에서 여야 의원들은 재정준칙 도입에 큰 틀의 합의를 이루면서 법안 처리가 급물살을 타는 듯했지만 야권의 숙원 과제인 ‘사회적경제기본법’ 등이 논의 테이블에 오르면서 협상이 난항을 겪게 됐다. 여당은 사회적기업·협동조합 등에 대한 재정 지원, 세제 혜택 등의 내용이 포함된 이 법을 ‘운동권 대놓고 퍼주기 입법’으로 규정하고 반대하고 있다. 이달 이재명 민주당 대표가 ‘35조 추경’ 카드를 꺼내들면서 재정준칙이 결국 추경 편성과 연계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다만 기재위 간사인 유동수 민주당 의원은 “재정준칙과 추경을 묶어서 처리하려는 생각은 없다”고 선을 그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기재위는 법안 처리 실적이 가장 저조한 상임위 중 한 곳이라는 불명예를 안게 됐다. 국회 의안정보시스템에 따르면 올해 초부터 이날까지 기재위가 법률에 최종 반영한 의안은 모두 242개로 외관상으로는 적지 않다. 하지만 뜯어보면 실상은 다르다. 242건 중 ‘수정안 반영 폐기(지난해 말 처리된 세입예산안 부수 법률안에 반영돼 폐기하기로 한 법안)’가 221건에 달했고 ‘대안 반영 폐기(가결된 법안과 내용상 차이가 없어 본회의에 부의하지 않기로 한 법안)’가 18건이었다. 실질적으로 처리된 법안은 K칩스법을 비롯해 단 3건에 불과했다. 이마저도 모두 1분기에 처리된 법안들로 2분기에 의결된 법안은 0건이다. 반면 올해 상반기 보건복지위원회는 60건(이하 대안 반영 폐기 제외), 국토교통위원회는 44건, 정무위원회는 37건,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는 24건의 법안을 본회의에서 가결시켰다.
‘일하는 국회’를 표방하고 올해 매달 임시국회를 열었음에도 초라한 성적표를 받아들자 기재위 내부에서도 ‘타 법률안을 논의의 우선순위에 올려 논의해야 한다’ 등의 자성의 목소리가 나온다. 어렵게 재정준칙이 통과돼도 기재위는 섰다 멈췄다를 반복할 것으로 전망된다. 윤석열 정부가 내세운 ‘시민단체의 부정·부패 카르텔 깨기’ 기조에 맞춰 여당은 시민단체의 감사 보고서 제출 의무 기준 등을 강화한 보조금관리법 개정안을 최우선으로 처리할 방침이다. 하지만 한 민주당 관계자는 이와 관련해 “법률 개정에 앞서 시민단체의 부정이 보다 폭넓게 확인될 필요가 있다”며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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