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에서 복기(復棋)는 자기반성의 시간이라고 한다. 한때 우리나라를 대표했던 조훈현 국수가 언급하기를 “승리한 대국의 복기는 이기는 습관을, 패배한 대국의 복기는 이기는 준비를 만들어준다”고 했다. 패자의 쓰라린 고통에서 무엇을 살피지 못했는지 짚어야만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 것이다.
경제가 어려울 때마다 기업의 투명성 제고와 경쟁력 강화를 목표로 수많은 제도를 도입한다. 하지만 효과는 늘 명확하지 않다. 대표적인 예로 기업회계를 들 수 있다. 지난달 국제경영개발대학원(IMD)의 발표에 따르면 한국의 회계 분야 경쟁력은 64개국 중 47위로 나타났다. 물론 대형 회계부정 사건으로 세계 최하위 수준에 머물던 시기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많이 개선됐다고 할 수 있지만 아직 중하위권에 머물러 있다. 이는 그간의 고민과 변화가 한국의 회계 분야 경쟁력 개선과 상관관계가 높지 않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신외감법 시행 5년을 뒤돌아보며 정부는 회계제도 보완 방안을 마련했다. 내부회계관리제도 외부감사 부담 완화, 상장회사 감사인 지정 비율 적정화, 표준감사 시간 적용 유연화 등 기업의 부담 완화와 안정적 제도 운용에 초점을 맞췄다. 일부에서는 기업의 반발로 회계 개혁의 취지가 퇴색됐다고 혹평한다. 그러나 제도 도입 당시 기업을 비롯해 다양한 이해관계자의 의견을 폭넓게 수렴했다면 오늘날의 이러한 혼선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독단에 가까운 일방적인 의사결정은 이해당사자 간의 불필요한 마찰과 논쟁을 유발하는 결과가 될 수도 있음을 인지해야 한다.
최근 ‘국제표준전산언어(XBRL) 재무공시 선진화 방안’을 발표하면서 표준화된 재무제표 전자공시가 세간의 이목을 끌고 있다. 핵심은 글로벌 추세에 맞게 기업 회계정보를 표준화해 공시하도록 하는 것이다. 정확한 회계정보를 제공하지 않으면 외국인투자가에 대한 정보 불균형이 생기고 주가수익비율(PER)·주가순자산비율(PBR) 등 한국 증권시장의 지표가 주요 경쟁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저평가받는 요인 중 하나라는 지적에 따른 조치다.
이번 선진화 방안이 자본시장 정보이용자의 효익 제고를 중심으로 마련됐다면 제도 시행 과정에서는 재무 정보 생산자이자 공급자인 기업의 고충에도 귀 기울이고 일정 부분 부담을 완화할 수 있는 효율적 실무 지원 방안도 동반돼야 할 것이다. 오늘날 자본시장에서의 국제적 정합성 확보와 표준화된 시스템의 구축·운영, 구조화된 정보 제공은 되돌릴 수 없는 과제가 됐다.
기업의 고충과 현실을 외면했던 이전의 시행착오를 복기해 효율적이고 합리적 제도 운영 방안이라는 바둑돌 한 수 한 수에 신중을 기한다면 글로벌 경영 환경에서 객관적이고 공정한 평가로 이어져 진정한 시너지 효과를 도출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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