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상 넉 달 정도가 한계인 것 같아요. 실비 보험을 써서 비급여 처방을 받다가 서너 달가량 지나면 식구들한테 미안해서 도저히 안 되겠다며 싼 약으로 바꿔달라고 찾아와요.”
장태원 고신대복음병원 호흡기내과 교수(대한폐암학회 회장)는 25일 서울경제신문과 만나 “민간 기업이 수익성에 얽매이지 않고 의약품을 무상으로 제공하겠다고 나서준 데 대해 그저 고맙다”고 말했다.
장 교수는 전날 상피세포성장인자수용체(EGFR) 돌연변이를 동반한 전이성 비소세포폐암 환자 2명에게 3세대 EGFR 티로신키나아제억제제(TKI) ‘렉라자’를 처방했다. 유한양행(000100)이 ‘렉라자’가 1차 치료제로 건강보험 급여가 적용될 때까지 의약품을 무상 공급하는 동정적사용프로그램(EAP)을 진행하겠다고 밝힌 지 약 2주 만에 첫 적용 사례가 나온 것이다.
현재 국내에서는 ‘이레사·지오트립’ 같은 1·2세대 약물만 건강보험이 적용된다. 이들 약제는 10개월 남짓 복용하면 내성이 생겨 약효가 사라진다. 이미 뇌로 전이된 환자들은 그마저도 효과를 보기 어렵다. 렉라자와 동일한 3세대 약물인 ‘타그리소’는 2018년 1차 치료제로 허가를 받았지만 5년 가까이 건강보험 적용을 받지 못해 한 달 약값만 600만 원에 달한다. 1년으로 환산하면 7000만 원 수준이라 장기 복용하는 환자는 전국을 통틀어 손에 꼽을 정도다.
장 교수는 “국내 기업이 막대한 비용을 들여 글로벌 임상 3상을 직접 수행했다기에 내심 조금이라도 저렴한 가격에 공급되기를 기대했던 게 사실”이라며 “예상보다 빠르게 1차 치료제 허가를 받은 것도 모자라 급여 처방이 가능해질 때까지 지원 규모에 제한을 두지 않고 무상으로 약제를 제공한다는 소식을 듣고 귀를 의심했다”고 말했다. 국내외 기업을 통틀어 전례 없는 결정인 데다 환자 규모가 어마어마하기 때문이다. 폐암학회 회장도 믿기 어려웠다고 하니 환자들이 ‘정말 약값을 안 내고 가도 될지’ 여러 번 물었을 법도 하다.
EGFR 돌연변이는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 국가에서 유독 발생률이 높다. 렉라자 같은 3세대 약물을 1차 치료제로 처방받아야 하는 4기 폐암 환자는 어림잡아도 3000명가량 된다. 고신대복음병원에서도 이미 EGFR 폐암으로 의심되는 세 번째 환자가 EAP 등록을 위해 최종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 장 교수는 “한 달 전 폐선암 1기 진단을 받은 60대 환자가 있었는데 수술장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막상 가슴을 열어보니 4기라 수술이 불가능하다는데 환자가 낙심할까 봐 염려하던 찰나 EAP 진행 소식을 들었다”며 “EAP 1호 환자로 등록돼 삶의 희망을 되찾는 모습을 보니 다행스러웠다”고 말했다. 장 교수에 따르면 이미 미국·일본 등 주요 국가에서는 3세대 약물이 EGFR 돌연변이 양성 비소세포폐암 1차 치료제 처방의 80%가량을 차지한다.
실제 언론 보도를 통해 렉라자의 무상 공급 소식을 접한 환자와 보호자들의 반응은 폭발적이다. 그는 “EGFR 돌연변이가 확인된 환자들에게 3세대 폐암 신약을 무상으로 제공받을 수 있는 프로그램이 있다는 말을 꺼내기가 무섭게 ‘이미 알고 있다’고 말한다. 국내 환자들이 오랜 기간 3세대 약물을 기다려왔다는 방증일 것”이라며 “폐암 진단 이후 절망하던 환자들이 병을 이겨낼 수 있다는 희망을 갖는 계기로 작용하기를 바란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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