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 때마다 얼굴이 좋아지시는 것 같아요. 수치도 전부 좋습니다. ”
“누가 떼어준 간인데 함부로 쓸 수 있나요. 교수님 말씀대로 ‘아들한테 선물 받은 간’이라 여기며 열심히 관리하고 있습니다. 저와 가족들에게는 생명의 은인이신걸요. 감사합니다.”
올해 초 세브란스병원 장기이식센터 외래진료실. 서경제(64·가명)씨가 주동진 이식외과 교수에게 연신 고개를 숙이며 진료실 문을 나섰다.
두 사람의 인연은 10년 여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서씨는 2009년 간암으로 6개월 시한부 판정을 받았던 환자다. 오른쪽 어깨를 포함해 상반신에 뻐근한 통증이 느껴져 동네의원을 찾았는데 생각지 못한 암진단을 받자 하늘이 노래졌다.
◇ B형간염 바이러스 있으면 간암 위험 100배…약물 복용해도 100% 예방 어려워
“저는 체질상 술도 많이 안 먹는데요?” 겨우 정신줄을 부여잡은 서씨에게 주치의는 25년 전 진단 받았던 ‘B형간염’을 상기시켰다. 그는 만성 B형간염 바이러스 보유자다. 20년 넘게 항바이러스제를 처방 받아 복용하다 별다른 증상이 없어 3년 전부터 중단했다. B형간염 보유자는 일반인보다 간암 발생 위험이 100배가량 높다. 실제 간암으로 진단받는 환자의 3분의 2 정도는 만성 B형간염이 원인이다. 만성 B형간염 환자의 약 20%에서 간경변이 생기고 그 중 5%는 간암으로 진행된다. B형간염 치료제를 복용해도 간염 바이러스를 완전히 없애진 못한다. 다만 바이러스 증식을 억제해 간암 발생 위험을 절반 가량 낮출 수 있다.
서씨의 경우 간은 물론 간에 혈액을 공급하는 간문맥과 체내 정맥 혈관 중 가장 큰 하대정맥에 암성 혈전이 침범했고, 폐에도 암이 전이되어 이식수술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약을 임의로 끊은 게 화근이었을까?’ 스스로 병을 키웠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자책하며 집으로 돌아온 서씨는 식음을 전폐한 채 며칠을 보냈다. 가족들의 성화를 못 이겨 이 병원, 저 병원을 찾았다니다 주 교수를 만났다.
◇ “고민될 때는 해라” 멘토 가르침 따라…다학제 협공으로 ‘간이식’ 성공
“쉽진 않을 겁니다. 그래도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봐야죠.” 일반적으로 전이암이 있는 환자는 이식 수술을 받지 못한다. 이식을 하더라도 다른 장기로 전이되거나 재발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해야 할까 말아야 할까 고민될 때는 해라’ 서씨의 검사 소견을 검토하며 며칠째 고민하던 주 교수는 지도교수이자 멘토였던 김유선 이식외과 교수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고 동료 의료진들에게 S.O.S를 청했다.
“간문맥과 하대정맥을 침범한 혈전과 폐 전이가 해결되면 해볼만 하겠는데요.” 이식외과를 필두로 방사선종양학과·흉부외과·소화기내과·영상의학과 등 여러 진료과가 총출동한 자리서 ‘가능한 모든 치료를 시도해 보자’는 결론이 내려졌다. 방사선종양학과와 소화기내과는 환자를 동시에 치료하는 다학제진료 시스템 기반 항암방사선 동시요법(CCRT·Concurrent Chemoradiotherapy)에 나섰다. 방사선 효과를 증진해 종양축소 효과를 높이면서 간 내 전이를 억제해 환자의 병기를 낮추는 방법이다. 흉부외과에서는 폐 전이 치료, 영상의학과에서는 고주파 열치료와 경동맥화학색전술을 시행하면서 차츰 희망이 생겼다.
주 교수는 “처음엔 간이식이 불가능했지만 다학제적 치료를 통해 간 외 전이암이 모두 치료됐고 종양 크기가 줄어 간이식을 받을 수 있을 정도로 병기가 낮아졌다”며 “간 적합성 검사에서 당시 21세였던 아들이 지원하면서 간이식을 시도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시한부 판정을 받은 지 꼬박 4년이 지난 2013년 1월, 서씨와 아들은 나란히 수술장으로 들어갔다. 서씨는 면역억제제를 복용하고 정기적으로 컴퓨터단층촬영(CT) 검사를 받으며 10년 넘게 재발 소견 없이 건강한 삶을 유지하고 있다. 세브란스병원 장기이식센터의 긴밀한 다학제 진료 시스템이 빛을 발한 사례다.
◇ 韓, 뇌사자 간이식 30%에 불과…"장기·조직기증 활성화 시급해"
간은 탄수화물부터 단백질, 지방 등 영양분 대사부터 해독, 살균작용 등에 이르기까지 체내에서 수많은 기능을 담당한다. 간에 문제가 생기면 그만큼 치명적이다. 신장의 경우 혈액·복막투석 등을 하며 버틸 수 있지만 간이 딱딱해지는 간경변 말기는 대체요법조차 없다. 황달이 생기고 복수가 차다가 간성 뇌증이 심해져 뇌부종이 생기면 사망에 이르게 된다. 주 교수가 남들이 주저하는 고난도 수술도 마다하지 않는 이유다. 그는 “간이식 수술이 유일한 희망인 상황에서 포기하지 않고 도전해 환자의 생명을 건졌을 때 보람을 느낀다”면서도 “우리나라는 미국·유럽 등 해외 선진국에 비해 뇌사 기증자 수가 턱없이 낮다. 3개월 안에 이식을 받지 못하면 사망할 가능성이 80% 이상 되는 위급한 지경에 이르러야 겨우 이식을 받는데 기약 없이 이식을 기다리다 사망하는 환자도 너무 많다”고 안타까워 했다.
간이식은 살아있는 사람의 간 일부를 잘라 환자에게 이식하는 ‘생체 간이식’과 ‘뇌사자 간이식’으로 나뉜다. 국내에서는 뇌사 기증자가 드물어 가족 또는 친척 간 생체 간이식이 전체의 약 70%를 차지한다. 장기이식 대기자 명단에 이름을 올려놓고 기약없이 기다리고 있는 이들은 4만 명이 넘지만 뇌사 장기기증자는 400명 남짓에 그쳤다. 간이식 대기 환자로만 한정해도 6400명 가까이 된다. ‘기증자가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는 편견’ 탓에 생체간이식을 주저하는 경우도 많다.
◇ ‘천하보다 귀한 한영혼을 위해’…이식 후 관리 도우려 앱 개발도 나서
주 교수는 수술을 앞두고 불안해 하는 환자와 가족들을 만날 때마다 ‘간을 둘로 쪼개서 나누면 둘다 행복해진다’며 안심시키곤 한다. 장기이식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바로 잡고 싶어서다. 최근에는 간이식 후 관리를 효율적으로 돕기 위해 애플리케이션도 개발하고 있다. 어렵사리 이식을 받고도 알코올 의존을 고치지 못해 2~3년만에 또다시 간이 망가져 찾아오는 환자들이 마음에 걸려서다.
‘천하보다 귀한 한 영혼을 위하여 최선을’ 주 교수의 연구실에 쓰여진 진료철학이다. 그는 “장기기증에 관한 인식이 하루빨리 개선되길 바란다”며 “좋지 않은 상태의 기증 장기를 호전시켜 좀더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위한 연구에도 더욱 힘쓰고 싶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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