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경제의 활력이 떨어지고 있다. 미국 등 선진국에서는 해마다 새로운 유니콘(기업 가치 10억 달러 이상의 비상장사)·데카콘(100억 달러 이상) 기업이 등장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전통 산업에서든 신산업에서든 새로운 플레이어를 찾아보기가 힘들다. 그 배경에는 기업들이 성장하기를 꺼리는 ‘피터팬 증후군’이 자리 잡고 있다. 작은 벤처기업이 대기업으로 성장한 뒤 또 다른 벤처·스타트업에 투자해 대기업을 키워내는 선순환 구조가 정착된 선진국과 달리 우리 기업들은 성장 자체를 기피하고 있다.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인 권종호 한국중견기업학회장은 30일 서울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중소기업에서 벗어나 중견기업이 된 뒤 3년의 유예 기간이 끝나면 각종 정부 지원이 끊기고 수많은 규제에 시달리게 된다”며 “성장 가능성이 크고 경제 기여도가 높은 중견기업을 선정해 집중 지원함으로써 성장을 꺼리는 피터팬 증후군을 없애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글로벌 스탠더드와 맞지 않는 규제도 과감히 개선해 우리 경제의 신진대사를 끌어올려야 한다”고 주문했다.
-우리 경제에서 중견기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어느 정도인가.
△중견기업은 전체 기업 수의 1.4%에 머무르고 있다. 하지만 기업 수에 비해 기여도는 매우 큰 편이다. 전체 수출의 17.7%를 차지하고 매출의 15.4%, 고용의 13.1%를 각각 책임지고 있다. 산업 경쟁력의 튼튼한 허리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것이다. 중요도도 갈수록 커지고 있다. 중견기업의 수출액은 2011년 659억 달러에서 2021년 1138억 달러로 늘어났다. 매출은 같은 기간 428조 원에서 853조 원으로, 고용은 93만 4000명에서 159만 4000명으로 증가하는 등 거의 모든 항목에서 두 배 이상 늘었다. 특히 우리의 약점인 소재·부품·장비 분야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왔다. 제조 분야 중견기업의 84.6%가 소부장 산업을 영위하고 있다.
-우리나라 중소기업들이 피터팬 증후군에 빠져 있다는 문제가 계속 나오는데.
△어른이 되기 싫어 어린이로 남아 있으려는 현상을 피터팬 증후군이라고 한다. 우리나라는 중소기업이 중견기업으로 도약하는 것을 꺼리는 현상이 유독 심하다. 이는 정부 지원이 중소기업에만 집중돼 있기 때문이다. 현재 중소기업을 지원하는 법률만 50여 개에 달한다. 하지만 중견기업이 되면 3년의 유예 기간 이후 중소기업으로서의 지원을 받지 못하고 규제까지 새로 받게 된다. 이른바 규제 절벽을 맞는 셈이다. 중소기업에서 갓 졸업한 중견기업은 이런 규제에 제대로 대처하기 어렵다.
-중견기업도 중소기업 못지않게 인력난이 심하다는 지적이 있다.
△지방 중견기업들은 중소기업보다 더 심각한 인력난에 시달리고 있다. 특히 금형·용접·주조 등의 기술을 활용해 사업을 영위하는 뿌리 기업은 주력 산업의 핵심이지만 3D 업종으로 인식돼 신규 인력을 확보하는 데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더욱이 직원 고령화로 인해 기술 단절마저 우려되는 상황이다. 외국인고용허가제는 제조업의 경우 직원 300명 미만이거나 자본금 80억 원 이하 기업에 한해 허용되고 있어 중견기업은 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다. 지방 소재 및 뿌리 기업은 회사 규모와 관계없이 외국인 근로자 고용허가제 대상에 포함돼야 한다.
-중소·중견기업이 가업 승계가 쉽지 않아 기업 경영을 포기하는 사례가 적지 않다고 하는데.
△일본은 경영승계원활화법을 통해 가업 승계를 적극 지원하고 있다. 자녀에게 경영을 승계하는 경우는 물론 제3자에게 경영권을 넘길 때에도 다양한 방식의 혜택을 제공하고 있다. 자녀가 가업 승계를 원하지 않더라도 회사 임원이나 직원 중 경영을 승계할 만한 인물이 있을 경우 일정한 조건하에 지원해줌으로써 우수한 기술과 고용을 유지하도록 돕는 것이다. 우리도 이런 제도를 참고할 필요가 있다. 가업 승계를 부의 세습이 아닌 기업 승계라는 관점에서 바라봐야 한다.
-중소기업에서 벗어나 중견기업이 되면 어떤 불이익이 생기나.
△중소기업을 갓 졸업하면 우선 인력 채용과 관련한 지원이 끊긴다. 청년 근로자의 자산 형성을 지원하고 장기 재직을 유도하는 청년내일채움공제 사업이나 중소기업 취업자 소득세 감면 등이 대표적이다. 매출액 3000억 원 미만의 초기 중견기업의 임금 수준은 대기업 대졸 초임의 66%에 불과해 구인이 어렵다. 외국인고용허가제 대상도 대부분 중소기업에만 적용돼 중견기업은 외국 인력 채용마저 쉽지 않다. 이들 지원은 중견기업에도 폭넓게 적용해줄 필요가 있다. 경영권과 관련해서는 중소벤처기업에만 허용되는 복수의결권 주식을 중견기업도 발행할 수 있도록 허용 범위를 넓혀줘야 한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중견기업에만 특화된 지원책이 절실하다.
-우리나라 기업 지원이 중소기업에 집중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중견기업의 숫자는 5000여 개로 전체 기업의 1.4%에 불과하다. 정치적으로 표에 도움이 되는 기업군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렇다 보니 대부분을 차지하는 중소기업에 지원이 몰리는 경향이 있다. 기업 관련 법안의 대부분이 의원입법인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
-최근 중견기업 특별법이 상시법으로 전환됐다.
△중견기업법(중견기업 성장촉진 및 경쟁력 강화에 관한 특별법)은 2014년 10년 한시법으로 제정됐으며 윤석열 정부의 국정과제에 따라 올해 3월 상시법으로 전환됐다. 중견기업이 법적으로 중소벤처기업이나 대기업과 구별되는 기업군으로서 확실한 지위를 얻었다는 의미가 있다. 다양한 법적 지원을 받을 수 있는 근거를 확보한 것이다. 하지만 법체계만 상시법으로 전환됐을 뿐 내용을 살펴보면 달라진 것을 찾아보기 어렵다.
-피터팬 증후군을 최소화하려면 중견기업 지원책에 무엇이 담겨야 하는가.
△중소기업과 차별화되면서 중견기업에만 집중적으로 적용되는 지원책을 담아야 한다. 중소벤처 기업 지원은 유니콘 기업의 육성을 목적으로 하는 반면 중견기업 지원은 데카콘 기업 육성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즉 중견기업이 돼야만 지원받을 수 있는 제도를 만들고 엄정한 절차를 거쳐 선정된 중견기업에 대해서는 기업이 원하는 각종 지원 제도를 일괄적으로 집중 지원함으로써 기업과 정부가 함께 세계적 기업을 육성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중소기업에서 중견기업, 대기업으로 이어지는 성장 사다리를 구축할 수 있다. 중견기업에 특화된 인센티브 제도를 마련해 중견기업이 되면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하는 데 매우 유리하다는 시그널을 시장에 줘야 한다는 것이다. 중견기업이 데카콘 기업으로 도약하면 이들 기업이 또 다른 벤처·스타트업에 투자할 수 있도록 길을 터 창업 생태계에 돈이 흘러들어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미국과 우리나라의 가장 큰 차이는 경제 신진대사에 있다. 미국은 성공한 기업이 벤처에 투자해 창업 생태계의 선순환 구조가 이뤄지는 반면 우리나라는 그렇지 못하다는 게 큰 문제다.
-외국도 중견기업을 따로 분류해 중소기업과 지원을 달리하고 있는가.
△우리처럼 단일법으로 중견기업을 따로 지원하는 나라는 매우 드물다. 다만 중견기업 정책은 많은 나라에서 시행하고 있다. 독일의 히든 챔피언 기업 육성이 대표적이며 일본의 경우 지방 경제와 연계해 중견기업 육성 정책을 실시하고 있다.
-우리나라 기업 법제 중 개선이 시급한 것은 무엇인가.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지 않는 제도를 손질해야 한다. 우선 법인세 구간이 지나치게 세분화돼 있다. 이 역시 피터팬 증후군을 유발하는 제도 중 하나다. 외국처럼 법인세 구간을 단순화해야 한다. 실제 중견기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를 해보면 중소기업 졸업 이후 가장 부담되는 요인으로 ‘조세 부담 증가’가 가장 많이 거론된다. 기업의 필요에 따라 다양한 종류의 주식 발행을 대폭 허용하고 스톡옵션 외에 조건부 주식(restricted stock)을 허용하는 등 인센티브 제도도 다양화해야 한다. 무엇보다 기업 규모에 따른 규제를 철폐하는 등 규제 합리화가 이뤄져야 한다. 기업들 입장에서는 정책 자금 지원보다 규제 합리화가 더 큰 도움이 된다. 법률은 정치적 타협의 산물이라고 하지만 일본 등 선진국은 경제·기업 법제에 대해서는 정치인이 함부로 손대지 않는다는 불문율을 지키고 있다. 경제 관련법에 이념이나 성향이 반영되면 경제적 효율성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우리 정치권이 가장 명심해야 할 대목이다.
◆He is…
1959년 경북 안동에서 태어나 건국대 법학과를 졸업하고 일본 도쿄대에서 법학 석·박사 과정을 마쳤다.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로 재직하면서 한국경제법학회·한국상사법학회 등 다수의 학회를 이끌었다. 법무부 회사법 개정위원회 위원, 국민연금기금 의결권행사 전문위원회 위원장, 코스닥시장 상장위원회 위원장 등을 맡아 자본시장 및 기업 관련 제도 개선 방안을 만드는 데 힘써왔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