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2010년만 해도 탈중앙화를 내세우며 등장한 비트코인이 화폐로서 제 역할을 할 수 있을지 의문을 가진 시선이 지배적이었다. 10여 년이 지난 지금 비트코인을 비롯한 가상자산(암호화폐)을 대하는 세계인의 시각은 크게 변했다. 많은 전문가들이 암호화폐가 기존 화폐를 대체하기는 여전히 힘들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투자 자산으로서 혹은 대안 화폐로서는 상당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본다. 암호화폐는 제도권 금융에 들어올 수 없다고 선을 그었던 학계와 정부도 암호화폐를 제도 안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고민하고 있다.
신간 ‘화폐의 미래’는 암호화폐를 둘러싼 이 같은 금융 시장의 변화를 분석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책은 비트코인의 등장부터 최근 각국의 중앙은행이 디지털화폐(Central Bank Digital Currency·CBDC)를 발행하는 움직임까지 다룬다. 국제통화기금(IMF), 브루킹스연구소 등에서 국제금융전문가로 손꼽히는 에스와르 프리사드 교수가 쓴 이 책은 이코노미스트, 파이낸셜타임스, 포린어페어 등에서 ‘올해의 책’으로 선정됐다.
책에 따르면 비트코인은 2008년 리먼브라더스가 파산을 선언한 지 6주가 지난 시점에 등장했다. 비트코인은 정부, 중앙은행이 발행하고 유통량 등을 관리하는 기존 화폐와 달리 P2P(개인간) 네트워크를 통해 탈중앙화된 메커니즘으로 작동된다. 정부, 중앙은행에 특권적 지위를 부여하지 않고도 화폐로 기능할 수 있는 게 특징이다. 비트코인이 등장했던 시기는 리먼브라더스의 파산과 이후 미국 정부의 양적 완화 정책으로 시장에서 미국 정부, 중앙은행, 금융기관에 대한 신뢰가 바닥을 쳤을 때였다. 미국 금융 시스템이 붕괴되는 것 아니냐는 목소리가 나오는 상황에서 정부, 중앙은행 등이 없어도 된다는 새로운 화폐에 시장의 이목은 집중될 수 밖에 없다.
완벽한 타이밍에 등장했음에도 비트코인은 제한된 양으로 인해 교환 수단보다 투자 수단으로 더 선호됐다. 비트코인 가격이 롤러코스터를 타면서 전 재산을 비트코인에 투자하는 사람이 늘었다. 저자 역시 “경제학자로서 전 재산을 비트코인과 여타 암호화폐에 건 사람들이 염려스럽다"면서도 "또 한편으로 이 책을 마무리한 2021년 5월 당시 비트코인 가격을 보면 지난 몇 년을 이 책에 투자하는 대신 비트코인을 구입하는 데 투자하는 것이 나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고 털어놓았다.
비트코인을 포함해 암호화폐가 투자 수단으로 더 주목 받으며 전통 시장 문법을 깬 새로운 상품들을 탄생시키기도 한다. 저자는 한 사례로 ‘플래시론(flash loan)’을 꼽았다. 플래시론이란 암호화폐가 거래소마다 다른 가격에 거래되는 점에 근거해 만들어진 상품이다. 담보 없이 거액의 자금을 빌려 낮은 가격에서 판매되는 거래소에서 암호화폐를 구입하고 이후 높은 가격에 거래되는 거래소에서 되팔아 차익을 실현하는 구조다. 담보 없이 대출을 받을 수 있어 기존 금융시장 문법으로는 나오기 어려운 상품이다.
이 같은 혁신성, 대안성에도 불구하고 암호화폐가 가진 한계는 명확하다는 게 저자의 생각이다. 화폐 가치의 변동성이 지나치게 크고 장점으로 꼽혔던 탈중앙화된 메커니즘이 대량 소매 거래를 불가능하게 만든다. 다크웹에서 거래되거나 자금세탁에 악용되기도 한다. G20 재무장관 및 중앙은행 총재들이 지난 2018년 “암호화 자산이 금융 안정성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며 우려를 드러낸 것도 이 때문이다.
미국, 중국 등 중앙은행이 CBDC 발행을 추진하는 것도 결국 암호화폐의 장점을 최대한 활용하면서 동시에 단점은 최소화시키기 위해서다. 특히 복지 분야에서 CBDC로 지원금을 지급할 경우 사용처를 지원 목적에 맞게 제한하는 것도 가능하다. 현금으로 줄 때보다 훨씬 더 효율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셈이다.
저자는 암호화폐나 CBDC 모두 기존의 화폐를 완전히 대체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대신 그는 새로운 기술 및 시스템으로 기존 금융에서 소외됐던 사람들이 금융에서 새로운 기회를 얻을 가능성이 열렸다고 진단한다. 그는 “탈중앙화된 금융에서 발전은 그것이 가장 절실한 인구층에게 혜택을 줄 수 있는 잠재력이 있지만 기술의 전환적 힘에 대한 장밋빛 비전에 도취돼서는 안 된다”며 “암호화폐든, 혁신적 금융상품이든 정부의 감독과 규제에서 비롯되는 신뢰를 토대로 삼았을 때 효과적으로 작동하는 듯하다”고 말한다. 2만9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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