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 스타트업 연구모임인 ‘유니콘팜’ 대표를 맡고 있다 보니 다양한 스타트업들의 사정을 알게 될 때가 많다. 사업 분야도 다양하고 사정 또한 각양각색이지만 여러 이야기를 듣다 보면 문제점들이 겹쳐 보일 때가 있다. 최근에는 양궁이나 쇼트트랙 같은 올림픽 출전 종목도 아닌데 국적을 바꾸는 게 낫다는 권유까지 받는 한국 스타트업도 생겼다.
올 7월 교육 분야 스타트업들과 간담회를 진행하며 ‘링글’이라는 인공지능(AI) 기반의 비대면 영어 교육 스타트업을 만났다. 이성파 링글 대표는 아이비리그 등 해외 유수 대학의 재학생을 튜터로 기용해 맞춤형 영어 수업을 제공하는 서비스를 시작했다. 영어라는 장벽에 좌절했던 본인의 경험이 창업 동기가 됐다. 그러나 사업 대상을 성인에서 청소년으로 넓히면서 장벽을 마주했다.
국내법상 아이들을 가르치는 원어민 강사는 최소한 대학교 졸업생이어야 한다. 아무리 해외 유수 대학에 재학 중인 학생이라 할지라도 한국에서는 영어를 가르칠 수 없다. 이에 많은 이들이, 특히 투자자들이 이 대표에게 이 같은 제한이 없는 미국으로의 본사 이전을 조언했다고 한다. 이 얘기를 들으면서 필자 역시 ‘그럴 만하다’는 생각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국적만 바꾸면 금메달을 딸 수 있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이 대표의 다음 발언을 들으면서 정신이 바짝 들었다. 이 대표는 “그래도 한국 기업으로 끝까지 해보고 싶다”고 간절히 말했다. 왜 그렇지 않겠는가. 수많은 스타트업들이 시작되고 사라진다. 그중 우리가 이름이라도 들어본 곳들은 없는 길을 만들어가며 성공을 거뒀다. 스스로의 정체성과 가치관이 언젠가는 높이 평가받을 날이 올 것이라는 믿음 하나로 고난을 견디며 묵묵히 없는 길을 만들어낸 단단한 사람들. 스스로 굳은살을 만들며 성장한 만큼 ‘한국 기업’이라는 속성도 당연히 버리고 싶지 않을 터였다.
실제로 수많은 스타트업들이 오직 믿음 하나로 한국에서 사업을 지속하고 있다. 미용의료 정보 플랫폼 ‘강남언니’는 부작용 우려가 높은 미용의료 정보를 투명하게 드러내겠다는 취지로 시작됐다. 그러나 최근 비급여 정보 공개 범위에 대한 해석으로 의협과의 갈등이 계속되며 부침이 많은 상태다. 사실 강남언니는 옆 나라 일본에서 2년간 60배나 성장하며 1위 플랫폼으로 자리 잡았다. 이쯤 되면 가시밭길인 한국에서의 사업을 포기하고 일본 사업에만 전념할 법도 하다. 그럼에도 강남언니를 운영하는 힐링페이퍼 역시 똑같은 얘기를 할 것이다. 한국의 스타트업으로 남고 싶다고.
코로나19 대유행 당시 비대면 진료로 많은 사람에게 편익을 가져다 준 ‘닥터나우’ 역시 “국내에서는 찬밥이지만 해외에서 더 인정을 받는다”는 평이 일반적이다. 지난해만 해도 해외에서 디지털 헬스 부문 혁신상을 받았고 100대 유망 기업 헬스케어 부문에 선정되는 등 화려한 수상 이력을 가졌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유독 갈등의 한복판에서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다.
수많은 장벽과 갈등에도 ‘한국의 스타트업’으로 남고 싶다는 그들의 의지에 이제는 국회가 답할 때다. 이들의 진심을 믿고 함께 길을 터줄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기업으로 세상을 바꿔보겠다는 사람들 앞에 부끄럽지 않은 국회를 만들기 위해 오늘도 넥타이를 고쳐 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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