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연합(EU) 회원국들이 배터리 시장에 대한 특단의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면 향후 6~7년 내로 중국산 제품에 대한 의존도가 심해질 것이라는 문제 제기가 EU 내부에서 나왔다. 현 상황을 방치한다면 지난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당시 EU 국가들이 러시아산 천연가스에 의존했다가 곤욕을 치렀던 경험을 배터리 산업에서 답습할 수 있다고 우려한다.
로이터통신은 17일(현지 시간) EU가 다음 달 스페인 그라나다에서 열리는 정상회의에서 공개할 보고서를 인용해 이같이 주장했다고 보도했다. 보고서는 “리튬이온 배터리와 연료전지에 대해 EU가 강력히 조치하지 않으면 2030년에는 중국에 의존하게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EU가 특히 배터리 시장점유율을 고민하는 것은 2050년까지 목표로 하는 탄소 중립과 무관하지 않다. 탄소 중립을 달성하려면 태양광·풍력 등으로 생산한 재생에너지 특성상 이를 저장하는 배터리가 필수적이기 때문에 재생에너지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중국 의존도가 급증할 수 있다.
보고서는 “리튬이온 배터리와 연료전지, 전기분해 장치에 대한 수요가 앞으로 몇 년간 10~30배 폭증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전기분해 장치에서는 EU가 시장점유율 50%를 넘는 막강한 위치에 있지만 배터리와 연료전지 시장은 중국산에 크게 의존하고 있으며 특히 중국은 이른바 ‘세계의 배터리 공장’으로 군림해왔다.
전기차용 배터리의 경우 올 상반기 시장점유율 상위 10개 업체 중 중국 기업이 6개이며 이들 업체의 시장점유율을 합산하면 52.6%에 이른다. 특히 전 세계 배터리 업체 중 유일하게 시장점유율 30%를 넘는 CATL은 유럽 등 해외시장에서 2배 가까이 점유율을 높였다.
보고서는 특히 중국산 배터리의 높은 시장점유율이 어느 정도로 위험한지를 두고 과거 EU 국가들이 러시아산 천연가스에 의존했던 상황에 빗대 설명해 눈길을 끌었다. EU집행위원회 자료를 보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전인 2021년 기준 러시아산 천연가스의 비중은 EU의 가스 소비량에서 40%를 웃돌았다. 또한 석유와 석탄 수입량에서 러시아산의 비중도 각각 27%, 46%로 결코 적지 않다. 로이터통신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EU가 러시아로부터 에너지 수입을 중단하면서 가격이 급등하고 인플레이션도 상승하면서 유럽중앙은행(ECB)은 기준금리를 급격히 인상해야 했다”고 지적했다. 이에 EU는 다음 달 정상회의에서 배터리 등 분야에서 중국에 대한 의존이 주는 위험도를 완화하고 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 등지로 공급망을 다양화하는 문제를 논의할 예정이다.
EU는 3월 초안을 공개했던 핵심원자재법(CRMA)을 통해 배터리용 핵심 광물의 중국 의존도를 낮추고 역내 배터리 생산 비중을 높이겠다는 의지를 강하게 표출한 바 있다. 법안을 보면 2030년까지 배터리 등에 들어가는 핵심 광물을 수입할 때 단일 국가의 비중이 65%를 넘어서는 안 되도록 규정하고 있다. 폐배터리 내 포함된 핵심 광물을 최대 45%까지 재활용할 수 있도록 수집·분류·처리 시설을 만들어야 한다는 의무도 규정했다. 자원이 풍부한 유사 입장국과 전략적 파트너십을 체결해 공급선 다변화도 추진한다는 구상도 공개했다. 특히 핵심 광물을 EU 내에서 가공해야 하는 비중이 협상을 통해 초안의 40%에서 50%로 올라갔다. 한편 보고서는 디지털 기술 분야에서도 배터리 분야와 유사한 시나리오가 전개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보고서는 “센서, 드론, 데이터 서버, 저장 장비 및 데이터 전송 네트워크와 같은 디지털 장치에 대한 수요가 향후 10년간 급격히 증가할 것으로 보인다”며 “EU는 데이터 전송 네트워크를 제외한 다른 분야에서 상당한 약점이 있다”고 지적했다. 이러한 해외 의존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면 2030년에는 EU의 산업·서비스 생산성 향상도 심하게 방해 받을 수 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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