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란드에서 우크라이나까지 야간열차를 타고 이동하면서 이 땅을 차지하기 위해 유럽의 열강들이 지난 한 세기에 걸쳐 치열한 각축전을 벌인 이유를 넉넉히 짐작할 수 있었다. 우크라이나의 대지는 지구상의 그 어느 곳보다 비옥하다. 전쟁에도 우크라이나의 철도는 여전히 깨끗하고, 편안하고, 편리했다. 열차는 제시간에 키이우에 도착했다. 정확한 열차 운행은 우크라이나에 관해 많은 것을 말해준다. 전쟁 중에도 키이우는 거의 정상인 듯 느껴진다. 러시아 침공 1년 만에 키이우 인구의 절반이 외부로 탈출했지만 피란민들 중 상당수가 이미 되돌아왔다. 현지 소식통에 따르면 전쟁이 시작되기 전 390만 명 정도였던 주민 수는 현재 360만 명을 헤아린다.
전시 상황임에도 도시의 상점과 카페는 손님으로 붐볐다. 지인의 집에서 저녁 식사를 하던 중 공습경보가 울렸지만 식사를 중단하고 대피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도시 곳곳에 스러진 영웅들을 애도하는 추모 게시판이 세워져 있었고 거리의 요소마다 모래주머니와 방어벽이 설치돼 있었다.
주민들은 한결같이 지쳤지만 차분해 보였다. 군인 및 민간인 희생자 수와 파괴된 도시 중 어느 쪽을 잣대로 삼건 간에 우크라이나는 참담한 손실을 입었다. 벌써 수년째 키이우에 거주 중인 독일인 친구는 “우크라이나인들은 아침에 눈을 뜰 때마다 사상자 집계가 늘어나는 감당하기 어려운 ‘새로운 정상(nomalcy)’에 적응하고 있다”고 전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인들은 탈진과 포기를 한 묶음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현지에서 만난 사람들 가운데 실지 회복을 위한 싸움을 중단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실망스러운 우크라이나군의 대공세는 전쟁이 장기화할 것임을 시사한다. 그럼에도 키이우에서 만난 많은 사람들은 한결같이 “때 이른 평화협상은 일시적 휴전을 의미할 뿐”이라고 말한다. 러시아군은 언제든 다시 쳐들어올 것이기 때문에 평화협정은 전쟁의 부담을 다음 세대에 떠넘기는 것에 불과하다는 주장이다.
이처럼 우크라이나인들은 한목소리로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는 주문을 외우지만 긴 얘기를 나누다 보면 조금씩 다른 결이 느껴진다. 일각에서는 러시아가 진정한 안전을 보장한다면 돈바스와 크림반도에 대한 러시아의 합법적 지배를 법적으로 인정하지 않는 상태로 휴전에 합의할 수 있다는 속삭임도 들린다. 익명을 요구한 우크라이나 정치인은 “직접 총을 들고 싸우지 않는 사람들이 대체로 협상과 절충을 거부한다”며 “우리는 전쟁터의 군인들과 일선에서 돌아온 병사들의 생각을 물어야 하고 그들은 자신들의 견해를 분명하게 밝혀야 한다”고 강조했다.
역설적으로 들리겠지만 지금 키이우가 우려하는 대상은 러시아가 아니라 서방이다. 거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일부 유럽 국가들 사이에서 우크라이나에 대한 지지가 줄어들고 있기 때문이다. 이달 말로 예정된 슬로바키아 선거에서 뚜렷한 친러시아 노선을 표방한 포퓰리스트 총리가 예상대로 승리할 경우 유럽의 정책 변화를 시도 중인 헝가리의 빅토르 오르반 총리는 든든한 지원군을 얻게 된다. 미국에서도 우크라이나 지지 열기가 식고 있다. 관측통들은 러시아가 내년까지 현재의 경로를 유지하며 버티기에 들어갈 것으로 전망한다. 내년 대선에서 러시아가 원하는 대로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승리할 경우 워싱턴은 우크라이나를 걸고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거래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이것은 노골적인 침략을 정당화하고 푸틴과 시진핑 같은 독재자를 더욱 대담하게 만드는 재앙의 시나리오다. 규범을 무시하는 독재자들은 국제 시스템의 규칙을 다시 쓰기를 원한다. 로버트 케이건의 말대로 이들이 뜻을 이루면 국제사회는 정글로 변하고 만다.
서방세계는 종종 이념과 가치를 달리하는 독재 정권의 편에 서서 전쟁을 치렀다. 우크라이나는 이들과 다르다. 독립국가에 대한 확고한 의지를 갖고 있을 뿐 아니라 서방세계가 가장 귀중히 여기는 자유의 가치를 공유한다. 우크라이나인들은 러시아를 상대로 장기적인 소모전을 치러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에 비해 4배나 많은 인구와 15배가 넘는 경제 규모를 지닌 대국이다.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에 맞서 끝까지 버틸 각오가 돼 있지만 우방국들은 그렇지 않다는 게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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