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매는 얼마나 지독하고 잔인한 병인가. 치매는 주변 사람을 힘들게 해 수많은 가족들을 망가뜨린다. 그러나 이 접근에서 간과되고 있는 중요한 사실은 환자 자신의 고통과 혼돈이다. 연극 ‘더 파더’는 주변인의 고통 뿐 아니라 환자 자신의 고통을 처절하게 그려낸다.
평온한 나날을 보내던 노인 ‘앙드레'가 갑자기 이상한 현실을 자각한다. 사랑하는 딸이 갑자기 파리를 떠나겠다고 하고, 결혼을 했는지 이혼을 했는지, 혹은 아무 것도 아닌지 알 수가 없다. 집에는 모르는 사람이 계속해서 찾아오고, 심지어 딸의 모습도 자꾸만 바뀐다.
앙드레는 인지하지 못하지만 그는 당연히 치매 환자다. 그는 점점 자기 자신을 상실해 가며 끝없는 공포 속으로 빠진다. 딸 안느와 연인 피에르, 간병인 로라도 힘든 것은 당연하지만 극에서 집중하는 것은 앙드레의 시선이다.
그가 지남력(오늘 날짜, 현재 시각, 본인이 있는 장소 등을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해 가는 것을 보여주는 대표적 소재는 시계다. 앙드레는 극 초반부터 자꾸만 시계를 찾고 시간을 확인한다. 하지만 시계는 당연히 없어지고, 시간 관념도 없어진다. “지금은 언제인가” “이곳은 어디인가”를 넘어서 “저 사람과 나는 어떤 관계인가”까지를 망각해 가는 그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섬뜩한 기분마저 든다.
극은 처음부터 끝까지 일말의 희망도 보여주지 않는다. 꼬인 시간선과 공간을 보고 있으면 절망감이 엄습한다. 딸은 결국 아버지를 요양원에 보낸다. “나는 누구지”라고 말하는 앙드레는 결국 엉엉 울며 아이처럼 엄마를 찾는다.
보호자들의 아픔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딸 안느는 지친 끝에 아버지를 목 조르는 꿈을 꾼다. 안느의 연인 피에르는 아무 것도 알아듣지 못하는 앙드레에게 “언제까지 주변 사람들을 힘들게 할 것이냐”고 일갈한다. 고령화 사회로 진입한 우리나라에서 치매 문제는 더 이상 외면하면 안 될 문제인 만큼 작품이 시사하는 바가 크다.
앙드레 역은 연극계의 대부 전무송이 맡았다. 딸 안느 역은 전무송의 실제 딸인 전현아가 맡아 더욱 애틋한 부녀관계를 보여 준다.
원작인 희곡 ‘아버지’는 프랑스 최고 연극상인 몰리에르상과 미국에서 토니상 최우수 작품상을 수상했다. 영화판인 ‘더 파더'도 아카데미 6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됐고, 각색상과 함께 안소니 홉킨스에게 남우주연상의 영예를 선사했다. 공연은 다음달 1일까지 세종문화회관 S씨어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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