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군사관학교가 교내 홍범도 장군 흉상 철거의 이유로 설명했던 ‘캠퍼스 종합발전계획’ 내에 흉상 이전 구상은 아예 없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육사가 왜 이념 논쟁을 자초하는지 그 배경에 대한 의구심이 커지는 분위기다. 홍범도 흉상 문제와 관련한 군 당국의 거짓말이 확인되면서 논란의 중심에 선 육사가 ‘왜 이러냐’는 질타가 쏟아지고 있다.
일부 언론에서 육군본부에 육사 종합발전계획에 대한 정보공개를 청구했다. 이에 대해 육군본부는 ‘정보 부존재’라는 답변을 내놓았다. 회신에서 “(요청한 종합발전계획은) 중기발전연구서로 기념물 재정비 사업에 대한 내용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며 “종합발전계획상 (홍범도 장군) 흉상 이전과 관련된 내용은 없다”고 밝혔다. 이는 국방부가 언론 브리핑에서 밝혀 왔던 설명과 크게 배치되는 것이다. 국방부는 흉상 철거 이유에 대해 지난해 11월 육사 종합발전계획의 일환으로 교내 기념물 재정비를 검토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이 때문에 거짓 해명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육군은 8월말 흉상 문제가 불거진 이후 언론 브리핑에서 수차례 육사 종합발전계획을 언급하며 교내 철거 배경의 근거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종합발전계획에 대핸 구체적인 내용과 작성 경위 등을 묻는 질문에는 확답을 피해왔다. 하지만 언론들의 정보공개 청구 결과 종합발전계획과 흉상 이전은 무관한 사실이 확인되면서 국방부와 육군이 국민을 계속해 기만해왔다는 비판에서 할 말이 없게 된 셈이다.
육사 ‘종합발전계획’ 흉상 이전 “언급 없어”
앞서 흉상과 관련한 군 당국의 허위 주장은 여러 차례 지적을 받았다. 국방부는 흉상 철거 이유 중 하나로 홍범도 장군의 ‘자유시 참변’ 연루설을 제기했지만 학계에서도 해석이 갈려 조심스러운 접근이 필요하다.그러나 군 당국은 입맛에 맞는 사실만 가져와 주장하는 ‘확증 편향’ 입장을 취해 스스로 논란을 자초했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당장 국방부 소속 전쟁기념사업회와 국가보훈부가 우원식 더불어민주당 의원에게 제출한 자료를 보면, 두 기관은 홍범도 장군을 오히려 자유시 참변의 피해자로 공훈록 등에 기록해 놓은 것으로 드러났다. 홍범도 연구의 최고 권위자로 꼽히는 반병률 한국외대 명예교수는 언론 인터뷰에서 학계?전문가 등과 충분한 검토를 거쳤다는 국방부 설명을 비판했다. 반 교수는 “홍 장군이 정말로 소련공산당의 핵심 당원이고 유력 인사라면 (스탈린의 강제이주로) 아랄해에 가까운 카잘린스크라고 하는 시골로 70세에 가까운 노인을 보내버리겠냐”며 “(국방부 주장)말이 되는 소리냐”고 지적했다.
일각에서는 육사가 이번에 초래한 교내 홍범도 흉상 철거 파동은 잠잠했던 육사 이전 문제를 수면 위로 끌어올리는 방아쇠 역할을 할 것이라고 평가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대선후보 시절 육사 이전을 공약으로 내걸고 이전 지역으로 지목한 논산 지역을 관할하는 국민의힘 소속 김태흠 충남지사도 “국방부와 육사가 (육사 내) 한미동맹공원을 조성한다는 것은 윤석열 대통령의 (대선 공약인) 육사 이전을 않겠다는 의미로 볼 수밖에 없다”고 비판하며 지역 민심이 격앙돼 있다고 전했다.
최근에는 국회를 통해 국방부가 밝힌 ‘육사 중기발전계획’에 당초 흉상 및 기념물 이전 내용은 아예 없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국방부가 육군사관학교 내 흉상 철거 근거는 거짓이었고, 오히려 일각에서 제기하는 흉상 철거에 중기발전계획 작성 이후 ‘외부의 입김’이 작용했을 가능성이 설득력을 얻게 된 것이다.
김병주·우원식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이 함께 입수해 공개한 144페이지 분량의 ‘육사 중기발전연구서 2023-2030 육군사관학교 2030년을 향하여!’ 문건에 따르면 육사는 △안보 및 교육훈련 환경 변화 △환경 변화를 고려한 개선 소요를 평가해 △교육체계 발전 △지적 역량 강화 △학교시설 발전 등 총 9가지에 걸친 육사 발전 분야별 구현 방안을 제시했다.
연구서는 또 “본 문서는 국방부와 육군본부 등 상급부대에 육사의 교육 발전에 필요한 정책적 소요를 제기하기 위한 지침서 역할”이라며 “중요한 교육정책을 결정해 나가는 과정에서 기본적인 방향과 지침을 제공하는 데 활용된다”고 밝혔다. 중기발전연구서 문건 어디에도 홍범도 장군 등의 흉상에 대한 교내 철거 부분은 전혀 없었다.
게다가 연구서의 ‘학교시설 발전’ 파트에서도 “시설개선은 단기간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중·장기적으로 구현해 나가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종합적인 시설발전 로드맵을 작성하여 체계적·단계적으로 시설개선 사업을 추진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만 명시했다. 홍범도 장군 흉상이 위치한 충무관은 신축 및 개보수 목록에 포함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 문건은 지난해 10월, 현재 동원전력사령관인 전성대 소장이 육군사관학교장 재직 시절에 작성했다.
육사 교내 철거, “외부 입김 작용” 지적
이런 탓에 흉상의 육사 교내 철거는 외부 입김이 작용이라는 지적이 제기된다. 국방부와 육군은 종합발전계획 안에 흉상 철거 세부적인 내용이 없다는 문건이 공개되면서 흉상 철거 계획 명시가 없다는 부분은 인정했다. 그러나 국방부는 “(홍 장군 흉상의) 위치가 적절치 않다는 것은 육사 내부에서도 이견이 있어서 그런 부분을 고려해서 지금 이전 또는 재정비를 검토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시설물 재배치 태스크포스(TF)를 구성해 구체적인 계획을 작성 중으로 (종합발전계획은) 전체적인 로드맵을 제시한 것이고 거기에는 구체적으로 독립군의 흉상이 언급된 것이 아닐 뿐”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국방부의 육사 교내 흉상 철거 계획 근거 주장 거짓으로 드러났어도, 홍범도 장군의 이력 문제에 대한 편향적 해석을 기반으로 한 철거 방침을 굽히지 않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는 것 이 같은 까닭이다.
홍범도기념사업회 이사장인 우원식 의원은 “흉상 이전은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발간된 육사발전종합계획에도 전혀 검토되지 않은 사안”이라며 “육사 정체성의 강점으로 독립군, 광복군을 거론했는데도 무리하게 강행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홍범도기념사업회는 조만간 흉상 철거 백지화와 책임자 처벌, 국군의 정통성에 대한 내용의 법제화를 요구하는 서명운동을 진행할 예정이다.
육사 출신이 육사 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홍범도 흉상 철거에 육군총장이 직접 관여한 것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육군사관학교가 홍범도 장군 등 독립전쟁 영웅 5위의 흉상 철거·이전을 결정하는 과정에 현 박정환 육군참모총장이 직접 관여한 것으로 확인됐다.
군 소식통에 따르면 육사 내 홍범도 장군 흉상 이전 관련해, 지난해 11월 박정환 총장 주관으로 열린 현장토의에서 학교 발전을 위한 4개 과제 중 하나로 선정된 것으로 알려졌다. 육군본부 직할부대라도 육사의 특수한 성격을 감안하면 참모총장이 학교발전 현장토의를 직접 주관한 것은 이례적이다. 이런 탓에 같은 해 10월 국회 국정감사에서 현 국방부 장관 후보자인 신원식 의원이 홍범도 흉상 배치를 강하게 비판한 지 약 한 달 뒤에 취해진 조치라는 점에서 세간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고 있다.
육군참모총장, 흉상 이전 직접 관여 정황
아무리 국감에서 문제가 제기되긴 했지만 참모총장이 빠르게 반응하며 진두지휘한 것은 상위 조직인 국방부를 비롯해 대통령실에서 이 문제를 아주 중요하고 민감하게 보다 있다는 판단 하에 참모총장이 직접 움직인 것이라는 비판이다.
이 논란에 대해 육군은 “육군 직할부대(육사)에 대한 지휘활동으로 학교 발전 방안과 관련해 생도 교과과정 개정 등 전반적인 내용이 보고됐고, 흉상을 포함한 학교 내 다수 기념물 혼재에 따른 재배치의 필요성에 공감하는 자리였다”며 과도한 의미 부여를 경계하며 예민한 반응을 보였다.
이와 관련해 지난해 11월 부임한 권영호 육사 교장은 최근 야당 의원들에게 “작년에 와보니까 벌써 11월에 독립군, 광복군(흉상)에 대한 이전 계획이 확정돼 있었다”고 밝힌 바 있다. 실제 올해 1월 육사 ‘기념물 재배치 태스크포스(TF)’가 구성된 이후 육사측 입장과 무관하게 교외 이전 주장이 강하게 제기된 것으로 전해졌다.
게다가 TF는 처음엔 재배치가 목적이었지만 점차 방출에 방점이 찍히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졌다. 논란이 되자 육사가 나중에 공식 부인했지만 홍범도 흉상 등을 없애는 대신 백선엽, 맥아더 흉상을 세우는 방안도 육사 내에선 전혀 검토되지 않았고 한다. 이런 정황 때문에 흉상의 육사 교내 철저에 외부의 보이지 않는 손이 개입했을 것이란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일각에서는 육사 종합발전계획은 사실상 대통령의 육사 이전 계획에 대응하기 위해 준비된 것인데, 이를 무리하게 끌어들이면서 해명 근거로 활용돼 스탭이 꼬였다는 지적도 나온다. 윤석열 대통려으이 대선 공약이었던 육사 이전에 대해 육군 및 육사가 현 위치를 고수하겠다는 반기를 든 것이라는 주장이다.
“육사 종합발전계획, 대선공약 정면 거슬러”
육사는 종합발전계획에서 ‘한미 동맹 기념공원’을 만든다는 계획을 제시했다. 육사 생도들에게 6·25 전쟁사를 강조하기 위해 한미동맹 기념공원 조성을 추진하다는 입장이다. 현재 육사에는 한미동맹의 상징인 미 육사 졸업생 참전 전사자 추모비와 밴 플리트 장군 동상 등이 배치돼 있다. 한미동맹 70주년인 올해 밴 플리트 장군 동상 자리를 중심으로 기념 공원을 조성하겠다는 취지다. 중요한 대목은 육사의 현재 위치를 고수하며 교내에 대규모 기념공원을 조성하려는 것인데, 이는 윤석열 대통령의 육사 이전 공약을 정면으로 거슬렀음을 자인한 것이라는 지적이다. 결국 육사 출신인 국방부 장관과 육군참모총장이 육사 이전을 반대한 것도 이 같은 방침의 연장선으로 해석할 수 있는 셈이다.
윤 대통령이 당선자 시절 대통령직인수위 지역균형발전특별위원회는 충남지역 공약보고회에서 급변하는 대내외 안보환경에 적합한 미래지향형 국방·보안산업을 추진하기 위해 1조600억 원을 투입해 육사의 논산 이전을 추진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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