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의 오랜 영토 분쟁 지역인 나고르노-카라바흐에서 아르메니아계 주민들이 대탈출을 시작했다. 아제르바이잔이 지난 주 이 곳을 장악하면서 약 12만 명의 아르메니아계 거주자들이 느끼는 생존 위협이 커졌기 때문이다.
아르메니아 정부는 나고르노-카라바흐 지역에서 아르메니아로 입국한 난민이 25일 오전 6시(현지시각) 기준 총 2906명이라고 발표했다. 난민 숫자는 전날 오후 10시엔 1050명이었지만 밤새 급증했다. 아르메니아 정부는 "(난민) 등록 절차를 마친 2100명 중 1000여 명은 스스로 정해둔 거처로 가기로 했고 나머지 1100명은 정부가 제공한 장소에서 머무르고 있다"고 설명했다.
나고르노-카라바흐 지역에 사는 아르메니아계 주민들의 탈출은 지난주 발생한 무력 충돌이 계기가 됐다. 아제르바이잔 국방부는 19일 나고르노-카라바흐에서 자국군과 민간인이 지뢰 폭발로 숨졌다며 '대테러 작전'을 개시했고, 하루 만인 20일 이 곳의 아르메니아계 자치정부로부터 항복을 받아냈다. 아제르바이잔은 아르메니아계 주민들의 권리를 보장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이를 믿는 주민들은 거의 없는 분위기다. 아제르바이잔은 무슬림, 아르메니아는 기독교인이 대부분이다.
아르메니아계 자치정부 지도자인 삼벨 샤흐라마니안 측의 다비드 바바얀 고문은 "(주민의) 99%가 우리의 역사적인 땅을 떠나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며 "우리의 운명은 아르메니아 역사, 나아가 문명 세계의 수치이자 불명예로 남을 것"이라고 통신에 말했다. 니콜 파시냔 아르메니아 총리도 24일 연설에서 "인종청소에 대한 효과적인 보호장치가 마련되지 않으면 나고르노-카라바흐 지역의 아르메니아인들은 자신들의 생명과 정체성을 구할 유일한 방법으로 망명을 택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우려했다.
나고르노-카라바흐는 1917년 러시아 제국이 멸망했을 때부터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가 모두 영유권을 주장했던 곳이다. 소련 시기 아제르바이잔의 자치 구역으로 지정돼 국제적으로는 아제르바이잔의 영토로 인정받지만, 아르메니아인들이 소련 해체기인 1988~1994년 1차 전쟁에서 승리해 미승인 공화국을 세웠다. 양측은 2020년 2차 전쟁을 계기로 러시아 평화유지군 주둔을 포함한 휴전에 합의했으나, 지난해 12월부터 갈등이 고조되다가 결국 아제르바이잔이 장악하기에 이르렀다.
일각에서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이 지역 분쟁에 개입하기를 꺼리며 아제르바이잔이 공세에 나섰다는 평가도 나온다. 파시냔 아르메니아 총리도 24일 러시아를 겨냥해 "일부 파트너 국가들이 (휴전) 조약에 따른 의무를 포함해 외교 관계에서의 규범을 지키지 않으면서 우리의 취약성을 노출시키고 있다"고 비판했다. 하지만 통신에 따르면 러시아 관리들은 파시냔 총리가 분쟁에 잘못 대처했다는 입장을 펴고 있다.
한편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튀르키예 대통령은 25일 일함 알리예프 아제르바이잔 대통령을 만나 분쟁 상황에 대해 논의할 예정이다. 이슬람 국가라는 공통 분모가 있는 두 국가는 동맹 관계다. 에르도안 총리는 지난 주 아제르바이잔의 군사 작전을 지지한다면서도 개입하지는 않았다며 선을 그은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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