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회사가 망했다. 40세에 돌연 실직자가 됐다. 아기공룡 둘리, 트랜스포머 카로봇, 유니미니펫 등을 배출한 애니메이션 PD에서 콘텐츠 라이센싱(재산권 활용 계약·Licensing) 분야로 전직한 지 6개월 된 시점이었다. 처음 맞는 실직. 한 달 동안은 늦잠도 자고 평화로웠다. 영어와 일본어를 구사하고, 해외의 굵직한 기업과 협업 프로젝트도 맡아 봤기에 어디든 재취업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예측은 빗나갔다. 홍제미나(54·사진)씨는 뒤늦게 이곳저곳 이력서를 내기 시작했지만 ‘놀랍게도’ 단 한 곳에서도 연락이 오지 않았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남들보다 이른 실직 경험을 딛고 이제는 13년 차 중장년 커리어 코치가 된 홍 대표를 만나 그의 전직 스토리와 전직 노하우에 관해 물었다.
커리어 코치로 전환
그의 눈에 ‘직업상담사’가 들어왔다. 노사발전재단에서 전직 강의를 듣는데, 수강생들에게 동기를 부여해주고 인생 2막으로 이끌어 가는 강사의 모습이 멋져 보였다. 마흔 살의 실직 덕에 ‘회사는 직원을 책임져 주지 않는다’는 사실도 일찍 깨우쳤다. 직업상담사는 조직이 없어져도 홀로 설 수 있고, 업종과 함께 자신도 성장할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평균 수명도 길어지고 있고 진로 고민은 어느 세대든 가지고 있는 거니까요. 직업상담사가 되기로 마음먹었죠.”
이 길이 아니면 안 된다는 절박함으로 공부했다. 무의식적으로도 공부해야 한다는 생각에 책을 녹음해 두고 잠자리에 들기 전 틀었다. 10년 치 기출문제도 달달 외웠다. 당시 합격률 25%에 불과했던 직업상담사 자격증 2급을 독학으로 2달 반 만에 취득했다.
인맥의 힘으로 전직…중장년에게 특히나 중요
노발재단의 강의에서 홍 대표를 눈여겨본 한 HR 컨설팅 기업의 대표가 이제 막 자격증을 따고 첫발을 내디딘 그에게 커리어 코치 팀장 자리를 제안했다. “회사에서의 경험을 발표하는 걸 보고 ‘뭘 맡겨도 해낼 사람’이라고 생각하셨대요.”
당시의 에피소드는 이러했다. 애니메이션 PD로 일할 당시 주말 내로 디지털 필름을 아날로그로 변환해 일본에 보내야만 했다. 토요일 새벽 2시, 소식을 듣고 회사로 달려가 서울의 필름 변환기를 수배했다. 밤을 꼴딱 새워 변환한 필름을 들고 공항으로 달려갔다. 무작정 사람들을 붙잡고 핸드캐리(Hand carry·화물을 직접 운반하는 것)를 부탁했다. 연이은 실패 중에 그를 딱하게 본 어느 모녀가 핸드캐리를 맡아줬다. 그 사례로 그는 실직 1년 반 만에 커리어 코치로 스카우트 됐다.
그는 자신의 사례처럼 중장년이 전직하기 위해서는 인맥의 힘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는 마케팅·무역 분야에서 애니메이션 PD로, 다음에는 커리어 코치 등 색이 다른 직업으로 전향한 ‘전직 전문가’인데, 전직의 순간에는 반드시 사람이 있었다. “애니메이션 PD도 주거래 은행 직원이 ‘일본어와 영어를 할 수 있는 사람을 찾고 있다’고 지인이 전해줘 들어가게 됐죠. 책을 내려고 원고와 기획안을 갖고 다니면서 만나는 사람마다 보여줬었는데 그때도 지인이 추천해 준 출판사에서 하게 됐어요. 강의할 때도 강조하지만 중장년의 경우는 특히나 인맥, 네트워킹이 정말 중요해요.”
‘스펀지’처럼 지내며 이질적인 경험 받아들이길
중장년의 전직을 위해서는 또 무엇이 필요할까. 홍 대표는 ‘스펀지’가 돼야 한다고 말한다. “아기가 수없이 단어를 들은 다음에야 말할 수 있게 되잖아요. 중장년도 이직·전직이라는 변화의 시기에는 지금까지 배워왔던 것들은 이미 다 써버렸다고 생각하고, 스펀지같이 ‘이질적인 경험’을 흡수하며 지내야 해요.”
특별한 경험만이 이질적인 경험은 아니다. 가지 않던 곳에 의외의 시간에 가는 것, 새로운 지하철 출구로 나가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이질적인 경험을 쌓다 보면 어디선가 실마리가 풀린다. 홍 대표도 그런 경험이 있다. “실직하고 오후 2시에 밖에 나갔는데 사람들이 길에 너무 많은 거예요. 이상했어요. 그날 큰 규모의 강의를 들으러 갔는데 좌석이 꽉 찼더라고요. 사실 프리랜서라는 말은 다 아는데도 그런 일이 와닿지는 않잖아요. 그때 방문했던 그 강연장에서 ‘회사에서 독립한 삶이 이런 거구나’하고 ‘나도 프리랜서를 할 수 있을까’란 생각이 처음 들었어요.” 그는 회사 소속으로 커리어 코치 일을 하면서도 자기 브랜딩을 하고 내공을 쌓으며 11년 일한 뒤, 2년 전 JEM코칭랩을 차리면서 독립해 프리랜서의 꿈을 이뤘다.
커리어 코칭을 13년째 해오면서 사소한 시도라도 안정된 곳, 자신이 쌓아왔던 것들에서 벗어나려는 사람들이 재취업을 잘한다는 공식도 발견했다. 한 직장에 오래 다닌 중장년은 자신의 한계를 긋고 시행착오를 두려워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시야를 넓히고, 자기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찾기 위해서는 새로운 시도를 하고 배울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실행’이라고도 강조했다. “상담할 때 ‘내가 알아서 할게요’, ‘그래, 너 뭐라고 하나 들어나 보자’라는 분도 계시고, 다음 상담에 올 때 뭐라도 도전해서 오시는 분들이 있어요. 그런 분들이 재취업했다는 연락이 비교적 빠르게 오죠.”
실직 기간을 넉넉하게 잡고 현실과 타협할 필요도 있다고도 말했다. “재취업 시기를 3개월 이내라고 답하시는 분들이 많아요. 그런데 실직 기간이 더 길어질 수 있다는 걸 염두에 둬야 합니다. 그리고 이상하게 종종 괜찮은 기회가 동시에 오는 경우가 있어요. 그러면 ‘다음에 또 이런 기회가 오겠구나’ 생각하고 놓아버리시거든요. 그럼 다시는 기회가 안 오는 경우를 봐요. 기회가 오면 어떻게든 잡고, 그다음 기회로 연결해야 해요. 이상이 있더라도 우리는 현실에 발을 디디고 살아야 하니까요. 타협해서 한 발 한 발 나가야 합니다.”
커리어 코치, 현장 변수에 대응하는 ‘순발력’ 필요한 일
베이비부머들이 은퇴하며 재취업 시장에 나온 중장년이 증가하고, 근로자 수 1000명 이상의 기업에서 재취업지원서비스가 의무화되며 ‘직업상담사’를 꿈꾸는 중장년이 많아졌다. 실제 직업상담사의 일은 어떨까. 홍 대표는 무엇보다 ‘순발력’, ‘성장 욕구’가 필요한 일이라고 말한다. PPT 슬라이드 한 장 한 장에 필요한 말이나 재밌는 스토리를 모두 외워 강의하는 강사도 있다. 초기에는 그런 단계가 분명 필요하지만 강의 현장에는 변수가 많다.
홍 대표의 동료 강사가 현장에서 갑자기 쓰러져 홀로 8시간 강의를 채워야 한 적도 있다. 어느 날은 50대를 대상으로 강의해달라는 의뢰를 받아 도착했더니, 30대들로 강의장이 채워져 있어 강의 내용을 청년에 맞게 바꿔야 했다. 강의 시간을 30~40분 줄이거나 늘려 달라는 부탁이 들어와도 이제는 담담하다. “머릿속에 쌓인 게 많아야 해요. 옛날에 배운 지식을 이야기하면 강의 의뢰도 바로 떨어지고 변수에 대응할 수도 없어요. 항상 트렌드를 파악하고, 콘텐츠를 개발해 둬야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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