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넘게 뮤지컬을 보고 또 봤지만 올해같은 해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창작 뮤지컬은 물론이고 해외 라이선스 공연까지 이름만 들으면 ‘아… 이건 꼭 가야해!’라고 생각할 만한 공연이 너무 많았습니다. 그리고 제가 올해 가장 기다리고 또 기다리고 있는 그 작품이 개막을 앞두고 있습니다. 바로 10년 만에 돌아온 ‘레미제라블’입니다. 이번 ‘레미제라블’은 부산에서 시작합니다. ‘오페라의 유령’, ‘캣츠’, ‘미스사이공’과 함께 세계 4대 뮤지컬로 불리는 이 작품을 보러 가기 위해 지금도 얼마나 많은 뮤덕들이 잠을 못 이루고 있을지 눈에 선하네요. 이번 주 ‘커튼콜’은 길고 긴 황금 연휴를 맞아 고향으로 혹은 교외로 나들이가는 분들이 이동 중 들어볼 만한 레미제라블의 수많은 명곡 넘버를 소개하는 시간을 가져보려고 합니다. 오랜 만에 열리는 만큼 이번 공연이 인생 첫 레미제라블인 분들도 많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소개하는 곡이 조금 많을텐데요. 그 이유는 제가 레미제라블의 모든 넘버를 거의 외우고 있을 정도라서 뭐 하나를 빼기가 힘들기 때문입니다. 모두 개막 전 넘버를 들으며 함께 그 웅장함을 느껴보면 어떨까요.
매킨토시 덕분에 탄생한 명장면 ‘Bring him home’
레미제라블은 모두가 알고 있듯 빅토르위고의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죠. 레미제라블의 주제는 ‘혁명’입니다. 가장 유명한 루이 16세 시절의 그 프랑스 혁명이 아니라 1832년 6월 5일 벌어진 6월 혁명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프랑스 혁명이 배경이고, 빅토르 위고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으니 당연히 프랑스 뮤지컬이라고 알고 계신 분도 많으실텐데요. 네, 프랑스 뮤지컬이 맞습니다. 레미제라블은 1980년 프랑스 파리에서 3개월 정도 공연하며 처음 뮤지컬로 탄생했습니다. 약 50만 명이 봤을 정도로 상업적으로도 꽤 성공했다고 해요. 하지만 이 작품을 본격적으로 세상에 알린 사람은 뮤지컬계의 미다스의 손, 영국의 카메론 매킨토시입니다. 이미 ‘캣츠’로 세계적인 제작자가 된 그는 레미제라블을 접하고 곧장 프로듀싱을 시작했다고 해요. 이후 그는 작품의 시놉시스와 넘버를 대폭 수정했고, 1985년 런던 바비칸 극장에서 다시 공연을 올립니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레미제라블은 사실 이 매킨토시의 수정본을 기준으로 합니다. 작품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넘버 중 한 곡인 ‘Bring Him Home’ 역시 이 수정본에서 탄생했습니다. 또 마리우스가 죽은 이들을 그리워하며 부르는 ‘Empty Chairs at Empty Tables’도 원작에는 없던 곡입니다. 따라서 어느 나라가 진짜냐 묻는다면 엄밀히 말하면 프랑스겠지만, 지금 사람들이 열광하고 있는 레미제라블은 매킨토시의 작품일 것입니다.
‘노동자여, 눈 깔고 노역하라’ vs ‘성난 군중의 목소리를 들어라’
레미제라블의 주인공은 장발장입니다. 하지만 ‘빵 하나를 훔치다 붙잡혀 19년간 옥살이를 한 장발장’이라는 사람의 인생을 그린 이야기라고 알고 있다면 소설을 처음부터 다시 읽어봐야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이 소설의 뒷부분이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소설이 워낙 어렵고 길기 때문이겠죠. 이런 이유로 실제로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레미제라블 공연이 시작됐을 때 많은 사람들이 ‘왜 장발장 이야기는 없고 프랑스 혁명 이야기만 나오느냐'고 의아해 했다고 해요. 하지만 소설의 전체 스토리를 알고 있다면 작품의 막을 여는 곡, ‘Work Song’부터 감동이 벅차 오르기 시작할 것입니다. 이 곡의 첫 가사는 ‘고개를 숙여(Look Down)’인데요. 저는 사실 ‘눈 깔아라고 번역해야 맞지 않나'라는 생각을 종종 했습니다. 그만큼 노동자들이 처한 상황이 가혹해 보였기 때문이죠. 노역을 견디고 있는 장발장과 그에게 가석방을 통보하는 자베르. 자베르는 장발장에게 ‘너는 나가 봤자 넌 계속 절도범이야’라는 뉘앙스의 막말을 퍼붓습니다. 고작 빵 한 조각을 훔쳤을 뿐인데 말이죠. 첫 넘버를 이해하는 건 레미제라블과 빅토르위고를 이해하는 데 아주 중요한 단추입니다. ‘Work Song’은 사실 뒤의 어떤 넘버보다도 당시의 시대상을 모두 반영하고 있습니다. 장발장이 장발장이 된 이유, 그리고 자베르가 자베르일 수밖에 없는 이유까지도요.
하지만 이보다 유명한 레미제라블의 넘버는 누가 뭐래도 ‘너는 듣고 있는가(Do you hear the people sing)’이겠죠. 사실 우리나라에서는 지난 2016년 당시 대통령 탄핵을 외치기 위해 서울 광화문에 몰려든 수많은 사람들이 이 노래를 크게 켜고 함께 부르거나 SNS를 통해 이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의 모습이 공유되면서 더 유명해지기도 했습니다. 저도 그 해에 이 공연을 봤는데요. 이 넘버가 나올 때는 실제로 엉덩이가 저절로 용수철처럼 의자에서 튕겨져 나오듯 기립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실 누가, 어떤 팀이 불러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만큼 이 넘버는 가사와 멜로디가 주는 힘 자체가 워낙에 강력하고 웅장해 ‘누가 불렀느냐’와 ‘어디서 불렀느냐’ 따위는 전혀 중요하지 않은 이 세상에 몇 안되는 넘버이기도 하죠.
팡틴도, 코제트도 아닌… ‘에포닌’이 부르는 ‘건물 속에 피어난 사랑’
저는 레미제라블에서 가장 매력적인 인물로 에포닌을 꼽습니다. 여관집 주인 떼나르디에 부부의 장녀인 에포닌은 어린 시절 고생을 모르고 자랐지만 집이 망하면서 프랑스 파리의 노숙자나 다름없는 행색을 하고 다니게 되죠. 코제트를 괴롭히고 사기나 치던 부모와 달리 에포닌은 악인은 아닙니다. 하지만 부모와 함께 크고 작은 범죄를 저지르면서 살아가죠. 그러다가 젊은 변호사이자, 코제트와 사랑에 빠진 마리우스 퐁메르시아를 사랑하게 됩니다. (지금부터는 약간 스포가 있으니 주의하세요.) 부모처럼 밑바닥 같은 삶을 살아가지만 결국 에포닌은 사랑에 인생을 겁니다. 팡틴의 ‘I dreamed a dream’ 만큼이나 유명한 곡이 바로 에포닌의 ‘On my own’인데요. 동명의 뮤지컬 영화 ‘레미제라블’에서는 에포닌이 건물 뒤에 숨어 마리우스를 바라보며 이 곡을 부릅니다. 돌아갈 곳도 없고, 집도 없고, 친구도 없는 에포닌이 마리우스만 바라보며 비를 맞는 모습은 짝사랑을 한 번이라도 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아플 만한 명장면이죠.
마리우스의 웃는 모습을 보기 위해 코제트에게 가는 방법을 기꺼이 알려주기도 하고, 함께 할 수 없다면 그냥 같이 죽자는 ‘자포자기’같은 행동을 하기도 하죠. 하지만 결국 에포닌은 마리우스 대신 총을 맞고 피를 흘리며 죽어갑니다. 그 때 등장하는 넘버가 바로 ‘A Little Fall of Rain’인데요. ‘빗방울이 조금 떨어지는 건 이제 아무렇지도 않다’며 마리우스의 옆에서 눈을 감는 에포닌을 보면서 오히려 장발장이나 팡틴 보다도 더 당시의 시대상을 보여주는 인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렇게 죽었지만 결국 세상은 장발장의 죽음 만을 기억하잖아요. 에포닌은 프랑스 혁명 당시, 혹은 세상의 수많은 혁명에서 죽어간 이름 없는 아무개 중 한 명입니다. 혁명에 나섰다 죽은 건 아니지만 혁명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할 정도로 배운 것 없이 살다가 가버린 인생, 아마 세상의 모든 위대한 역사는 수많은 에포닌을 딛고 벌어지는 것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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