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팬데믹이 끝나고 정부의 임시 공휴일(10월 2일) 지정으로 모처럼 긴 연휴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상당수 병원과 약국이 문을 닫는 명절 연휴에 아이가 아프면 참 난감하죠? 연휴 전에 상비약을 미리 준비해두는 게 최선이지만, 늘 구비해 두던 약도 막상 필요할 땐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필 쓰려고 보면 약의 사용 기한이 지난 경우도 있죠.
◇ 안전상비약 제도 도입 10년 넘었는데…품목 수는 13개 그대로
그럴 때 편의점에서 판매하는 안전상비약이 참 요긴합니다. '비상약'을 사러 편의점을 찾는 건 제법 익숙한 풍경이죠? 하지만 약국이 아닌 곳에서 의약품을 살 수 있게 된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시민사회를 중심으로 약국 또는 병원이 문을 닫는 심야시간이나 공휴일에 의약품을 구매하지 못하는 데 따른 불편을 완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자 보건복지부가 지난 2012년 5월 약사법을 개정하면서 24시간 운영하는 전국 편의점에서 의약품 판매가 가능해졌거든요.
물론 약국에서 파는 모든 약이 취급되는 건 아닙니다. 법적으로는 가벼운 증상에 시급하게 사용할 수 있는 필수 상비약 중 성분·부작용·함량·제형·인지도·구매의 편의성 등을 고려해 복지부 장관이 지정한 20개 품목을 24시간 운영 가능한 점포에서 판매할 수 있도록 명시되어 있죠. 약사법이 개정되던 2012년에 의·약 전문가와 시민단체 등으로 구성된 안전상비의약품 지정심의위원회가 꾸려졌고, 그해 11월부터 해열진통제 5종, 감기약 2종, 소화제 4종, 파스 2종 등 위원회가 지정한 13개 품목의 판매가 시작됐습니다. 이후 10년 넘게 품목 수나 구성의 변동 없이 유지 중입니다.
◇ 10년새 안전상비약 공급액 급증…휴일·심야시간 수요 높아
안전상비약 판매 규모는 매년 가파르게 성장해 왔습니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따르면 안전상비약 공급가액은 2013년 약 153억 원에서 2021년 457억 원으로 3배 가까이 커졌습니다. 특히 타이레놀 등 해열진통제 공급 규모가 급증했는데요. 2021년 '타이레놀정 500mg' 제품의 공급액은 212억 원으로 8년 전보다 4배 증가했습니다. 안전상비약 전체 품목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46.3%에 달합니다.
이 기간 소비자들의 의약품 구매 행태도 크게 달라졌음을 체감하게 됩니다. 의약품정책연구소가 성인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온라인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응답자의 68.9%는 '최근 1년간 편의점에서 안전상비약을 구매한 경험이 있다'고 답했는데요. 2013년 동일한 조사에서 안전상비약 구매 경험이 있다고 응답한 비율이 14.3%에 그쳤던 것과 비교하면 5배 가까이 증가했습니다. 편의점에서 안전상비약을 구매한 이유를 묻는 질문에는 ‘휴일과 심야시간에 약국이 문을 닫아서’라는 응답이 68.8%로 가장 많았습니다. 실제 응답자의 60.4%가 토요일과 일요일에 편의점에서 안전상비약을 구매한 것으로 조사되기도 했죠. 코로나19 기간 감기약 대란이 벌어졌을 때도 편의점 안전상비약의 활약이 컸던 것으로 파악됩니다.
◇ 해열진통제 2종, 1년 6개월 넘게 공백…종합감기약 성분 효능 논란까지
그런데 안전상비약 중에서 유독 수요가 높은 해열진통제와 감기약 수급에 빨간 불이 켜졌습니다. 해열진통제로 쓰이는 어린이용 타이레놀정 80mg과 타이레놀정 160mg, 2개 품목은 작년 3월부터 공급이 끊겼습니다. 제조사인 한국얀센이 국내 공장을 철수하면서 생산이 중단됐는데, 대안이 마련되지 않은 탓이죠. 해열진통제 5개 제품 중 2개 제품에 공백이 생긴지 1년 6개월이 넘은 셈입니다. 복지부는 지난 7월 “제조사의 공장 해외 이전으로 일부 품목의 허가가 취하됐으나 이미 생산된 재고량이 상당량 존재한다"며 "중단된 2개 품목의 안전상비의약품 지정 취소 및 대체약 추가 지정 필요성을 하반기 내에 신속히 논의하겠다"고 밝혔는데요. 3개월이 다 된 지금까지도 구체적인 대안은 제시되지 않았습니다.
감기약도 비슷한 처지에 놓일 가능성이 제기됩니다. 미국식품의약국(FDA) 자문위원회가 최근 코막힘 증상을 완화한다고 알려진 감기약 성분 ‘페닐에프린(phenylephrine)’이 실제로는 효과가 없다고 발표했는데, 하필 안전상비약 지정 품목인 동화약품의 판콜에이에도 페닐에프린이 포함되어 있거든요. 페닐에프린은 코 점막의 혈관을 일시적으로 수축시켜 충혈을 완화하는 기전을 통해 코막힘 증상 완화에 도움을 준다고 알려진 약입니다. 그런데 2007년 효능 논란이 제기됐고, 대규모 임상을 통해 복용 효과가 없다는 결론이 내려진거죠. FDA 자문위는 비강 출혈을 완화하는 효과가 없을 뿐더러, 효과적인 치료를 받을 기회가 지연될 수 있다는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관련 소식을 접한 식품의약품안전처도 페닐에프린 성분의 유효성을 검토하겠다고 밝혔죠. 최악의 경우 시장 퇴출 가능성도 거론됩니다. 안전상비약 13개 중 종합감기약은 2종 뿐인데, 그 중 하나에 효능 논란이 제기된 겁니다. 식약처가 페닐에프린 성분에 대해 사용 금지 등의 조치를 내린다면 편의점에서 구입할 수 있는 감기약은 단 1개만 남게 됩니다. 대체약 추가 지정이 불가피한 상황이죠.
◇ 지사제·제산제·화상연고 등 안전상비약 추가 지정 요구 이어져
사실 안전상비약 품목을 둘러싼 논란은 끊임없이 제기되어 왔습니다. 안전상비약 제도가 시행된지 10년이 넘었는데, 13개 품목으로 고정되어 있다는 이유에서죠. 경실련 등 일부 시민단체는 비상 상황에서 수요가 높은 지사제와 제산제, 항히스타민, 화상연고 등을 안전상비약으로 추가로 지정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여 왔습니다. 약사법 조항을 따지더라도 당장 7개 품목의 추가 지정이 가능한 상황이죠.
그런데 무엇이 문제냐고요? 일부 시민단체들은 약국 외 판매 의약품을 최소화하려는 약사단체의 반대에 가로막혀 논의에 진전이 없다는 의혹을 제기합니다. 실제 박근혜 정부 시절인 2016년 정부의 '서비스 경제 발전전략'에 상비약 품목확대가 포함되면서 제산제와 지사제 효능군 추가가 유력시 됐는데요, 당시 대한약사회가 강하게 반발하면서 성사되지 못했습니다.
상비약 편익에 공감하는 시민단체와 학부모단체가 자발적으로 모인 협의체인 ‘안전상비약 시민네트워크’는 복지부를 상대로 안전상비의약품 지정심의위원회 회의를 연내 재개하고, 안전상비약 품목을 약사법에 규정된 20개까지 확대하라고 촉구했습니다.
안전상비약을 취급하는 편의점들도 13개 품목을 모두 구비하고 있는 게 아니라 일선 시민들의 불편은 더욱 커보입니다. 지난 8월 미래소비자행동의 발표에 따르면 전국 1000여 개 안전상비약 판매업소 중 판매준수사항을 1건 이상 위반한 비율은 무려 95.7%에 달했는데요. 특히 전체 업소 중 13개 품목을 모두 구비하고 있는 곳은 4.9%에 그쳤습니다. 가뜩이나 안전상비약 품목이 제한적인데, 현장 접근성은 더욱 낮다는 얘기죠. 인구 밀집도가 낮아 병의원이나 약국 접근성이 떨어지는 지역은 24시간 운영되는 편의점마저 드물어 안전상비약 제도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조치가 시급하다는 지적도 나옵니다.
안전상비약 시민네트워크는 편의점 안전상비약 품목 확대 필요성을 어필하기 위해 온라인 서명 운동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서명을 통해 국민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정부 당국에 전달하고, 다시 한번 관심을 촉구하려는 취지에서죠. 온라인 서명에 참여한 분들이 남긴 글을 살펴보면 '섬 지역에 여행을 갔다가 아이가 아파 30분 가량 약국을 찾아다녔다'거나 '주변에 약국이 딱 하나 있는데 문을 닫으면 30분을 걸어가야 한다'는 사연들을 접하게 됩니다. 긴 연휴를 보내다 보니 안전상비약 제도 개선이 더욱 절실하게 다가오네요.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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