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의 대표적 사회보장제도인 국민건강보험이 가입자들의 과잉 의료 행위로 멍들고 있다. 저렴한 값에 의료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다 보니 꼭 필요하지 않은데도 매일같이 병원을 찾는 의료 과소비 행태로 지난해 268억 원이 넘는 돈이 낭비됐다. 소득에 맞춰 보험료만 지불하면 무한정 혜택을 볼 수 있다는 맹점을 악용한 가입자들의 도덕적 해이가 건강보험 재정에 큰 부담을 안기면서 재정 누수를 막기 위한 정책 도입을 서둘러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5일 보건복지부가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소속 김미애 국민의힘 의원에게 제출한 자료는 일부 건강보험 가입자들의 상식을 벗어난 의료 과소비 행태를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2022년 외래 진료를 가장 많이 받은 상위 5명은 그 횟수가 평균 1891회에 달했고 1인 평균 2669만 원의 건강보험 재정을 사용했다. 최다 빈도 이용자였던 대구에 거주하는 50대 남성은 지난해 한 해 동안 무려 3009회나 진찰을 받았다. 주말을 포함해 하루 평균 8.3회의 진료를 받은 꼴이라 ‘병원과 환자가 담합해 허위 청구한 것 아니냐’는 의구심도 제기된다. 이 남성이 지난해 의료기관 50곳을 순방하며 홀로 쓴 건강보험 급여비만 3306만 원이었다.
2018~2022년 연간 외래 진료 최다 이용자 5명의 진료과를 분석한 결과 이들은 주로 한방과에서 진찰을 받았다. 총 25명 중 12명(48%)이 한방신경정신과·침구과 등 한의원에서 진료를 집중적으로 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이 외에는 △정형외과 7명(28%) △재활의학과 2명(8%) △내과 2명(8%) 등이 그 뒤를 이었다.
우려스러운 것은 이런 의료 서비스 남용 행태가 극소수에 한정된 게 아니라 우리 사회에 횡행하고 있다는 점이다. 지난해 365회를 초과해 외래 진료를 받은 가입자는 총 2467명으로 집계됐다. 제 집 드나들 듯 하루 한 번 의료기관을 찾은 것이다. 이들이 지난해 한 해 사용한 건강보험 급여비만 268억 2100만 원이다. 1인당 평균 1087만 원을 사용한 셈으로 일반 국민 평균(69만 9000원)의 15.6배에 달한다.
의료 이용을 일삼는 가입자 중 상당수는 경증 환자로 추정된다. 실제 2020년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은 보고서를 통해 외래 진료 과다 이용자의 상당수를 물리치료 이용자로 분석한 바 있다. 물론 가입자도 병원 방문 시 평균 20%의 비용을 부담하고 있다. 병원 방문의 허들이 있는 셈이지만 따로 가입한 실손보험이 있으면 실질 부담률은 0~4%로 떨어진다. 땡전 한 푼 내지 않고도 진료를 받을 수 있는 여건과 병원을 안마 시술소쯤으로 여기는 사고방식이 결합돼 의료 쇼핑을 부추기고 있는 것이다.
올해 건강보험 누적 적립금은 25조 원을 넘어서며 곳간이 넉넉한 모습이지만 전문가들은 조만간 악화 일로를 걸을 가능성이 크다고 입을 모은다. 급격한 저출산·고령화 추세로 비용을 부담할 연령층은 급감하는 데 반해 혜택을 필요로 하는 노인층이 가파르게 증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회예산정책처가 지난달 발간한 보고서에 따르면 건강보험의 연간 지출은 2023~2031년 연평균 7.3%씩 증가해 2031년 164조 원에 도달할 것으로 예상된다. 하지만 건강보험의 수입 증가 폭은 연평균 6.5%에 그쳐 2030년에는 적립금이 고갈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일부 가입자들의 과소비를 감당할 재정 여건이 안 된다는 뜻이다.
횟수 제한 없이 혜택을 제공하는 현행 건강보험 체계를 손질해야 한다는 지적이 잇따르자 올해 2월 복지부는 연간 365회를 초과해 외래 진료를 받는 가입자의 본인 부담률을 최대 90%까지 높이는 ‘본인부담률차등제’ 도입을 예고했다. 이후 7개월이 지났지만 정부는 여전히 정책을 고안하는 단계다. 복지부 관계자는 “차등 비율, 예외 사항 등 제도 전반에 대한 연구용역을 진행하는 상황”이라며 “연내 제도 검토를 끝내고 내년에 도입할 방침”이라고 취지로 설명했다. 김 의원은 “과도한 의료 이용은 불필요한 의료비 부담을 증가시킬 뿐 아니라 적시에 치료를 받아야 하는 중증 환자의 진료 등을 가로막으며 의료 체제 붕괴를 야기하는 원인”이라며 개선책 도입을 서둘러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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