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대우그룹의 김우중 회장이 1989년에 쓴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는 책 제목이 떠오른다. 맥락은 다르지만 요즘처럼 글로벌 정치·경제 환경이 격변하는 시기에 잘 어울리는 문구인 것 같다. 미중 패권 전쟁으로 국가 간 합종연횡이 이뤄지는 와중에 팬데믹으로 인한 글로벌 공급망 붕괴를 경험하면서 많은 국가에서 경제 민족주의가 심화됐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1년 반 넘게 지속되고 있는 가운데 최근에는 하마스의 이스라엘 기습 공격으로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새로운 중동전쟁이 시작됐다.
유엔이 의욕적으로 추진했던 새천년개발목표(MDGs)에 이어 지속가능개발목표(SDGs)가 여전히 가장 핵심적인 글로벌 의제임에도 불구하고 현실은 각자도생에 급급한 모습이다. 급변하는 환경에 빠르게 적응해야 살아남는 속자생존(速者生存) 시대가 도래한 것은 맞지만 ‘길게 가기 위해서는 함께 가야 한다’는 평범한 진리를 잊어서는 안 된다.
지금은 역발상(逆發想)이 중요한 시점이다. 중동 사막에서 신발을 팔고 알라스카에서 냉장고를 팔아 성공할 수 있다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한 시대이다. ‘위기를 기회로’는 서서히 가라앉고 있는 한국 경제가 재도약하기 위해 우리에게 가장 요구되는 자세이다. 대내적으로 초저출산과 같은 심각한 구조적 문제가 산적해 있기는 하지만 대외적 요인이 우리 경제에 미치는 영향은 오히려 더 커졌다.
글로벌 중추 국가가 되기 위해 우리 정부가 선택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국제 개발 협력 강화다. 공적개발원조(ODA)를 포함해 개발 협력을 확대하는 것이 궁극적으로 우리가 살아남는 길이라는 인식을 공유해야 한다. 경제성장률이 1%대로 떨어지고 경제활동인구도 줄어들기 시작하면서 국내 인프라 시장은 사실상 포화 상태에 도달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돌파구가 필요하다. 천문학적인 누적 적자에 허덕이는 한국전력, 각종 비리로 지탄의 대상이 돼버린 한국토지주택공사(LH)를 비롯해 수자원공사·난방공사·발전사 등 대부분의 공사들이 생존을 위해 눈을 해외로 돌리고 있다. 민간기업도 마찬가지다.
아시아개발은행(ADB)에 따르면 아시아의 인프라 수요만 해도 2030년까지 매년 최소 1조 7000억 달러가 넘어설 것으로 추산됐다. 세계은행은 우크라이나 재건 비용이 1조 달러를 넘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이처럼 막대한 개발 재원을 당사국 정부나 세계은행과 같은 다자개발은행(MDB)이 모두 충당할 여력은 없다. 최대 80%에 달하는 부족분을 충당하기 위해 민간 재원을 동원해야 한다는 국제사회 개발 협력 트렌드의 핵심이 바로 개발금융이다. 개발금융은 주된 목적이 공여국의 상업적 이익이 아니라 수원국의 개발과 발전에 있기 때문에 ‘양허성’을 가진다는 점에서 순수한 민간투자와는 차이가 있다.
우리 정부는 2016년 한국 기업의 해외 진출 기반을 제고하고 신흥국과의 경제협력을 강화하기 위한 새로운 금융 지원 수단으로 ‘경협증진자금(EDPF)’을 도입했다. EDPF는 수출입은행이 금융시장에서 차입한 자금을 재원으로 하되 이자의 일부를 재정에서 보전함으로써 저금리로 개발도상국 인프라 개발 사업에 대출하는 방식이다. EDPF는 우리 기업 수주를 전제로 지원되는 대외경제협력기금(EDCF)과 달리 구속성은 없지만 수출 신용에 비해 금융 조건이 유리하기 때문에 EDCF 자금만으로 추진이 어려웠던 대규모 개발 사업을 가능하게 한다. 특히 신흥국 인프라 개발에 민관협력사업(PPP) 방식이 크게 늘고 있기 때문에 총사업비의 85%까지 유리한 조건으로 대출받을 수 있는 EDPF를 활용한 해외 PPP 시장 진출에 국내 기업들의 관심도 커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 유·무상 원조의 분절화와 부처별 집행이 고착화된 기존 원조 집행 구조로는 효과적인 개발금융 집행이 어렵다. 사업 형성 단계부터 유·무상이 유기적으로 연계돼 최종 수주까지 이어져야 하지만 과정이 생략된 채 결과만 추구하다 보니 실효성이 떨어지는 기계적인 결합이 이뤄지거나 참여 기회조차 잡지 못하는 일이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 지금이라도 통합적이고 혁신적인 개발금융이 가능해지도록 제도적 미비점을 보완하고 장기적인 전략을 수립해야 한다. 우리 기업들이 넓은 세상에서 일을 할 수 있도록 여건을 만드는 것은 정부의 의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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