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 사는 남성 A 씨는 올 6월 결별 통보를 받고 격분해 사귀던 여성 B 씨를 폭행해 경찰조사를 받은 뒤 접근금지 조치를 받았다. 재범 가능성이 높은 고위험 관계성 사건으로 판단한 수사관 2명은 B 씨가 귀가할 때 동행해 피해자를 해하려고 숨어 있던 A 씨를 현행범으로 체포하고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성범죄자의 거주지를 제한하는 ‘한국형 제시카법’ 추진으로 고위험 범죄자 관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가운데 스토킹이나 가정폭력 등 고위험 관계성 사건을 선별 및 집중관리하는 경찰의 치안 시스템이 주목받고 있다. 관계성 범죄는 강력 범죄로 커지기 전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신속하게 격리조치하는 게 가장 중요한 만큼 구속 및 유치 등 강력한 조치가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26일 경찰 등에 따르면 올해 1~8월 기준 서울경찰청의 스토킹과 가정폭력 구속 건수는 전년 대비 각각 35.3%(51건→69건), 54.8%(42건→65건) 증가했다. 유치 건수는 같은 기간 각각 121.1%(57건→126건), 68.0%(25건→42건) 급증했다.
같은 기간 서울청에 입건된 스토킹과 가정폭력 범죄 건수가 큰 차이가 없음에도 올해 인신 구속이 늘어난 것은 강력사건으로 이어질 수 있는 고위험 관계성 범죄를 경찰이 조기에 발견했다는 의미다. 인신 구속은 법원이 범죄의 중대성, 재범의 위험성, 피해자 위해 우려가 높다는 점을 인정했다는 뜻이다. 이는 서울청이 올해 3월 22일부터 시행 중인 고위험 관계성 사건 선별 및 집중관리 제도가 효과를 본 것으로 추정된다.
경찰은 2021년 서울 중구 신변보호 대상자 살인사건과 지난해 신당역 살인사건 등 최근 5년간 전국의 주요 강력 범죄를 분석해 고위험 관계성 사건 선별 기준을 정립했다.
선별 기준은 크게 △가해자와 피해자 관계 △가해자의 위험성 △피해자의 취약성 등 세 단계로 구성된다. 경찰은 먼저 부부 및 연인이 결별할 때 피해자에 대한 가해자의 집착이 얼마나 심한지를 살펴본다. 또 가해자의 전과, 신고이력, 폭력성 정도를 조사한 뒤 주거지 및 직장 노출 여부 등 피해자의 취약성을 종합적으로 고려한다.
실제 서울청은 이 같은 선별 기준을 토대로 올해 4월 접근금지 조치를 위반하고 배우자와 자녀뿐 아니라 처가 식구들까지 협박한 가정폭력범 C 씨를 구속했다. 검거된 C 씨의 차량에서 흉기가 발견된 점을 볼 때 살인 등 심각한 2차 피해까지 이어질 수 있는 아찔한 사건이었다.
임만석 서울청 여성청소년 과장은 “올해 8월 말까지 서울청 전체 여청사건 중 223건의 고위험 관계성 사건을 선별하고 집중관리를 해왔다”며 “내부적으로 살인까지 이를 수 있는 사건 8건을 사전에 예방한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도 스마트워치나 접근금지 명령만으로는 피해자 보호에 한계가 있는 만큼 경찰의 강력한 가피해자 격리 조치가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염건웅 유원대 경찰학부 교수는 “불구속 수사가 원칙이지만 관계성 범죄는 강력사건으로 커질 수 있는 악성범죄”라며 “피해자 보호와 범죄 예방이 무엇보다 중요한 만큼 고위험 관계성 사건 선별 및 집중관리 제도를 범정부 차원에서 도입해볼 필요가 있다”고 제언했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