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을 농업인으로 살아온 박 모(57) 씨는 매년 추수철 찾아오는 허리 통증을 값진 노동의 훈장처럼 여겨 왔다. 그런 박씨도 세월의 흐름을 피해갈 수는 없었던 걸까. 올해는 수확철을 앞두고 농기계를 점검하던 중 통증이 심해져 몸져눕고 말았다. 마을에서 가장 젊은 데다 청년 회장까지 맡고 있어 이웃들의 일까지 무리해서 도와준 것이 화근인 듯 했다. 밤새 극심한 허리 통증과 다리 저림 증상에 시달린 박 씨는 이튿날 날이 밝기 무섭게 시내 병원으로 향했다. 검사 결과는 ‘퇴행성 허리디스크’. 다행히 입원까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설명을 듣고 안심한 박씨는 열심히 통원 치료를 받기로 했다.
10월이 끝나갈 무렵이면 한적한 농촌도 도심만큼 분주해지게 마련이다. 도시 외곽을 지나다 드넓은 황금빛 논밭을 바라보면 올해의 결실을 맺기 위해 구슬땀을 흘리는 농업인들이 눈에 들어온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수확의 기쁨을 누려야 할 추수철에도 농업인들의 얼굴은 그리 밝지 못하다. 매해 팍팍해지는 인력난 탓이다. 젊은 세대의 농촌 유입은 거의 없고, 기존 농업인들의 고령화가 진행되면서 일을 할 수 있는 인구는 빠르게 줄어들고 있다. 덩달아 농촌 지역의 고령 인구 비율은 해마다 꾸준히 증가하는 추세다. 통계청의 ‘2022년 농림어업조사’에 따르면 지난해 전국 농업인 216만 여명 중 40대 이상 인구는 188만 여명으로 약 87%를 차지했다.
고령 인구 비율이 높아질수록 농업인들의 건강에는 적신호가 켜진다. 박 씨와 같이 농사일을 오랜 기간 이어온 농업인들은 척추를 비롯해 무릎, 어깨 등의 과도한 사용으로 퇴행성 질환을 앓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허리를 굽히거나 무거운 물건들을 자주 옮겨야 하는 농사일의 특성상 허리 통증은 농업인들의 대표적인 고질병으로 자리잡았다. 농촌진흥청의 ‘2022년 농업인 업무상 질병 현황’을 살펴봐도 허리(52.5%)는 근골격계 질환이 가장 많이 발생하는 부위로 나타났다.
퇴행성 허리디스크는 척추에 가해지는 하중을 분산시키고 외부 충격을 흡수하는 디스크(추간판)가 노화하며 발생하는 질환이다. 척추 퇴행이 진행될수록 디스크는 수분과 탄성을 잃고 납작하게 변한다. 그만큼 충격에 취약해지기 때문에 작은 압력에도 디스크를 감싸고 있는 섬유륜이 쉽게 손상된다. 그로 인해 디스크가 돌출되거나 내부 수핵이 흘러나온 경우 척추 신경을 자극해 염증을 유발하고 허리 통증과 하반신 저림 증상(하지방사통)의 원인이 된다.
퇴행성 허리디스크는 급성 허리디스크에 비해 하지방사통과 같은 신경 증세가 심하다는 특징을 갖는다. 척추가 노화되며 뼈 귀퉁이에 가시처럼 돋아나는 ‘골극’이 신경을 더욱 자극해 염증을 심화시키기 때문이다. 적절한 치료 시기를 놓쳐 질환 정도가 악화될 경우 영구적인 신경 손상과 하지 마비를 야기할 수 있다. 고령의 농업인들이 허리 통증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할 이유다.
한방에서는 퇴행으로 불안정해진 척추의 강화와 기능 회복을 위해 추나요법과 침·약침 치료, 한약 처방 등을 병행하는 한방통합치료를 진행한다. 추나요법은 틀어진 척추와 주변 관절을 교정하고 부드럽게 이완하는 한방 수기요법이다. 디스크에 가해지는 압력을 줄여줄 뿐만 아니라 통증 완화 및 가동범위 향상에 도움을 준다. 침치료는 긴장된 척추 주변 근육을 풀어 혈액순환을 원활하게 해주는 효과가 있다. 한약재 성분을 환부에 직접 주입하는 약침은 통증의 원인인 염증을 신속하게 해소하는 데 도움을 준다. 증상과 체질에 맞는 한약은 디스크에 영양을 공급하고 약해진 뼈와 근육을 강화시켜 허리디스크 재발을 방지하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허리디스크에 대한 한방통합치료의 효과는 자생한방병원 연구팀이 SCI(E)급 국제학술지 ‘근거중심 보완대체의학(Evidence-Based Complementary and Alternative Medicine)’에 발표한 논문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연구팀은 허리디스크 환자 505명을 대상으로 평균 45일간 한방통합치료를 진행하고 약 4년간 회복 경과를 살폈다. 그 결과 486명(96%)의 디스크가 자연 흡수된 것으로 나타났다. 그 중 70% 가량은 재발 없이 안정적인 호전세를 이어갔다.
올해는 유독 폭염, 수해 등 각종 재해가 겹치면서 농업인들의 상심이 컸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국민들의 풍성한 식탁을 위해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농업인들에게 존경의 박수를 보낸다. 내년에는 벼가 더욱 고개를 숙이고, 농업인들의 허리는 꼿꼿해지길 기대한다.
/안경진 의료전문기자 realglasses@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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