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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답 없는 혈우병 치료…"맞춤 전략으로 당뇨처럼 관리"[메디컬 인사이드]

■박정아 인하대병원 소아청소년과 교수

혈액응고인자 결핍으로 출혈 안 멎는 희귀병, 2000여명

중등증·중증 환자 88%…잦은 출혈로 관절 합병증 호소

출혈합병증 최소화하려면 일찍부터 꾸준한 예방요법 필수

혈우병은 출혈시 지혈을 돕는 혈액응고인자 결핍으로 발생하는 유전성 출혈 질환이다. 이미지투데이




“피가 잘 멎지 않는 병, 들어본 적이야 있죠. ‘참 딱하다, 힘들겠다’ 그 정도로 생각하고 넘겼던 것 같아요. 발목이 붓고 관절이 아픈 건 누구나 흔히 겪는 증상이잖아요. 설마 제가 혈우병일 거라고 어디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서경제(52·가명) 씨는 비교적 젊은 20~30대부터 관절 통증으로 속앓이를 했다. 평소 운동을 썩 즐기지 않는 편이라 야외활동은 손에 꼽을 정도인데 어쩌다 야유회에서 주위의 성화를 못 이겨 공을 몇 번 차고나면 무릎, 발목 관절이 쑤시고 부어올라 며칠씩 밤잠을 설쳤다. 낮은 체력을 핑계삼아 자연스레 운동과 거리를 뒀지만 나이가 들수록 관절이 뻣뻣해지고 통증이 심해졌다. 40대 후반에 이르러서야 고질적인 관절병의 원인이 혈우병인 걸 알았다. 무릎 통증으로 걷는 것조차 부담스러워져 정형외과적 시술이나 인공관절 치환술 등을 받을지 상담하기 위해 병원을 찾았다가 우연히 검사를 권유 받았고 ‘혈우병성 관절병증’ 진단이 내려졌다.

◇ 국내 혈우병 등록 환자 2000여 명…‘설마’ 하는 생각에 진단 놓치기도


혈우병은 출혈시 지혈을 돕는 혈액응고인자 결핍으로 발생하는 유전성 출혈 질환이다. 체내에서 혈액 응고에 관여하는 인자는 현재까지 12가지가 알려졌다. 제8 혈액응고인자가 결핍되면 혈우병 A, 제9 혈액응고인자가 결핍되면 혈우병 B로 진단한다. 두가지 유형이 전체 혈우병의 95% 이상으로 A형의 발생 빈도가 B형보다 5~8배 정도 높다. 세계혈우연맹(WFH)에 따르면 전 세계 약 80만 명이 혈우병을 앓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국내에서는 2019년 기준 혈우병 A 환자가 1746명, 혈우병 B 환자가 434명 등록되어 있다. 제11 혈액응고인자 결핍이 원인인 혈우병 C는 전체 응고인자결핍증의 약 2~3%를 차지한다고 알려졌는데 국내에서는 아직 보고된 사례가 없다.



혈우병은 체내에 혈액응고인자가 생성되는 정도에 따라 중증도가 나뉜다. 정상 수치를 100%라고 잡았을 때 △혈액응고인자가 1% 미만인 경우를 중증 △1~5%를 중등증 △5~40% 정도를 경증으로 경계선상에 놓인 경우를 제외하면 환자들의 증세가 중증도에 비례하는 경향을 보인다. 중증 혈우병 환자는 별다른 충격 없이도 관절이나 근육에 자발적인 출혈이 자주 발생한다. 증세가 심하다 보니 비교적 일찍 진단 받는 편이다. 중등증이나 경증 환자는 증상이 애매하게 나타나 뇌출혈 등 큰 출혈이 발생한 이후에나 진단되는 경우가 많다.

박정아 인하대병원 소아청소년과 교수는 “어린 나이에 뇌출혈이 발생하면 환자와 가족들이 평생 짊어져야 할 부담이 너무 커진다”며 “혈우병을 일찍 진단 받고 관리했다면 합병증이나 사고 위험을 줄일 수 있었을 것이란 생각에 안타까울 때가 많다”고 말했다.

◇ 혈우병성 관절병증, 삶의 질 저하 심해…예방요법 필수




2019년 한국혈우재단에 등록된 혈우병 A 환자의 72.1%(1259명)가 중증, 16.3%(285명)가 중등증이다. 이들은 관절 변이, 근육 위축증, 운동성 상실 등 심각한 합병증을 겪을 수 있다. 심하면 일주일에 1~2회 꼴로 출혈을 겪는데 반복될 경우 혈액이 관절에 고여 뼈와 연골을 파괴한다. 국내 혈우병 A 환자의 약 56%, 혈우병 B 환자 약 36%에게 혈우병성 관절병증이 나타나고 평균 50년간 겪는다는 조사 결과도 있다. 박 교수는 “혈우병성 관절병증이 있는 환자들은 관절병증이 없는 경우보다 더 높은 혈액응고인자 활성도가 필요하다”며 “처음 관절 출혈을 경험하면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을 수 있으나 이 때 제대로 관리하지 않으면 출혈이 더 잦아지고 쉽게 출혈이 발생하게 된다”고 조언했다.

학계에서는 6개월간 3회 이상 출혈이 발생한 관절을 ‘표적 관절’이라고 부른다. 표적 관절이 있다면 향후 합병증을 최소화하고 삶의 질을 개선하기 위해 적극적인 예방요법이 필요하다. 중증은 물론 중등증 혈우병에서도 꾸준한 예방요법이 중요하다는 연구 결과가 축적되고 있다.

◇ 혈우병 치료, 눈부신 발전…“신약만이 정답 아닐수도”


아직까지 혈우병은 근본적 치료가 어렵다. 부족한 혈액응고인자를 보충해 적절한 수준을 일정하게 유지시키는 게 최선이다. 과거에는 혈액응고인자가 들어있는 혈장을 일일이 수혈해야 했다. 매번 신선한 혈장을 구하기가 어렵고 수혈 중 각종 바이러스에 감염될 위험도 높아 환자들의 고통이 컸다. 1990년대 들어 인간 혈장으로부터 추출한 혈장유래 제제와 유전공학 기술을 이용해 제조하는 유전자재조합 제제가 개발됐고 정맥 대신 피하로 주사하거나 반감기를 늘려 일주일에 1번만 맞아도 출혈이 예방되는 신약도 등장했다. 아직 국내 도입 전이지만 유전자가위 기술을 이용해 혈우병의 원인 유전자를 교정하는 신약이 올해 초 미국, 유럽 규제기관의 허가를 받으며 완치 기대감도 제기된다. 물론 신약이라고 무조건 좋은 것만은 아니다.

박정아 인하대병원 소아청소년과 교수가 혈우병 치료에서 환자 맞춤형 전략의 중요성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사진 제공=인하대병원


박 교수는 “혈우병 환자의 라이프스타일이나 혈중 응고인자 농도, 생활 습관, 약동학(PK) 특성 등에 맞춰 개인에게 적합한 약제를 선택해야 한다”며 “삶의 질을 높이고 향후 합병증 위험을 낮추려면 무엇보다 꾸준한 예방요법을 유지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어 “혈우병 환자들도 집에만 있는 게 아니라 축구나 수영, 스키 같이 다양한 활동이 가능하다. 본인에게 맞는 정답을 찾는다면 당뇨병, 고혈압처럼 관리하며 살 수 있는 만큼 희망을 잃지 않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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