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에게 있어서 정치의 본질은 희망과 비전을 주는 것이다. 희망과 비전이야말로 모든 이가 당장의 어려움도 감내할 결기를 갖도록 하고 미래를 위해 최대한 노력할 동기도 부여하기 때문이다. 당장의 욕구를 채워주는 것도 무시할 수는 없지만 희망이 없는 삶이라면 당장의 욕구 충족이 큰 의미를 가질 리 만무하다.
고성과 막말이 일상이던 정치권에서 최근 여야 원내대표가 모여 정쟁 자제라는 신사협정을 맺고, 메가시티와 재정을 통한 3% 성장이라는 카드를 각각 내세우며 정쟁 대신 정책 대결로 방향을 전환한다고 한다. 늘 그렇듯 내년 총선이 다가오니 무언가 변화하는 모습을 보이려는 것 같다. 그 노력을 폄하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내용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실상 달라진 것이 별로 없어 안타깝다. 그래서 희망을 주는 정치를 향한 첫걸음으로 보기도 어렵다.
재정을 통한 3% 성장이라는 주장은 지난 정권의 소득 주도 성장만큼이나 사탕발림에 불과하다. 본질적인 혁신 없이 재정 지출로 일시적 성장을 만들어봐야 결국 정부 부채 확대나 증세로 인해 경기가 침체될 수 있다는 것은 이미 확인된 경제 원리다. 메가시티는 시장 원리에 역행하는 지역균형발전의 단점을 일부 보완할 수 있겠지만 주객이 전도된 것 같다. 주거 수요가 높은 대도시 경계 안의 주택 공급을 늘려 집값을 안정시키는 것이 우선이지, 시 경계를 외곽으로 넓히는 것이 근본 정책이 될 수는 없다. 오히려 편입되는 지역의 부동산 가격만 상승하고 규제만 늘어나기 십상이다.
이렇게 문제가 있는 정책 대결이라도 과거와는 달라진 모습이니 당장 국민의 눈길을 끌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려움을 겪는 국민들에게 희망과 비전을 심어주기에는 역부족이다. 우리가 당면한 어려움의 본질은 일자리, 자녀의 미래, 그리고 노후이므로 메가시티나 등락하는 성장률로 해결될 것이 아니다. 그래서 지금 정치권의 화두는 노동·교육·연금 개혁이어야 한다. 국민에게 희망을 줄 수 있으려면 이 3대 개혁을 실력으로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유연 안정성 제고라는 어려운 과제가 아직 남아 있지만 그래도 노동 개혁은 노조 회계의 투명성 제고라는 강력한 첫걸음으로 시작했다. 조합원의 권리도 보호되고 노조 활동의 정당성도 제고될 수 있어 노동시장에 긍정적인 변화의 바람이 기대된다. 반면 나머지 분야에서는 비전이 보이지 않는다. 교육은 입시 공정성이라는 화두에 매몰된 나머지 본질이라고 할 수 있는 개인의 능력 계발은 오히려 뒷전으로 밀린 듯하다. 모든 학생이 적성에 맞춰 능력을 최대한 키울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교육의 본질이며 공정한 교육이다. 지금처럼 다양한 적성을 가진 아이들을 학교 성적과 수능이라는 하나의 잣대로 줄을 세우는 것은 오히려 불공정한 교육이다. 같은 시험지로 시험을 본다고 공정한 교육인가. 같은 이과라도 생물을 좋아하는 학생은 생물에, 물리를 좋아하는 학생은 물리에 특화하는 것이 공정하지, 모든 학생에게 모든 과목 시험을 똑같이 치르게 한다고 공정한 것은 아니다. 동일한 이를 다르게 대하는 것이 차별이듯 적성이 다양한 학생들에게 획일적이고 동일한 시험을 강제하는 것도 차별이다. 오히려 더 심각한 차별일 수 있다.
연금 개혁은 그간 폭탄 돌리기의 희생양이었다.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 연금 문제의 본질은 바로 다단계 피라미드라는 점에서 시작하기 때문이다. 적게 내도 많이 주겠다는 지킬 수 없는 약속을 했고 청년층 인구가 감소해 그 차액을 메워줄 신규 고객이 줄어드니 거짓 약속의 심각한 문제가 빠르게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일반인이 이런 다단계를 했다면 처벌감이지만 다단계 연금 사업주인 정부는 말로만 개혁을 떠들다가 슬며시 다음 정부에 폭탄을 떠넘기고 임기를 마치는 직무 유기를 일삼아왔다. 그러면서도 어떤 처벌도 받은 바 없다. 내 임기 동안 연금 고갈만 없으면 된다는 식이다. 이제는 직무 유기가 아니라 연금 개혁을 실천하는 실력이 필요한 시점이다. 말로만 떠드는 것은 실력이 없는 이들이나 하는 것이다. 그리고 말로만 떠드는 것은 지난 정권에서 이미 지겹도록 봤다. 국민은 이제 실력으로 말하는 고수, 실천으로 입증하는 진정한 고수가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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