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두아르 마네의 ‘피리 부는 소년’이 살롱에서 낙선했다. 하지만 에밀 졸라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꾸밈이 없는 단정함, 부분과 묘사에 연연하지 않으며 불필요한 덧칠을 삼가는 마네의 화풍에 오히려 깊은 인상을 받았다. 살롱 비평가들은 특히 ‘피리부는 소년’의 배경 처리를 몹시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들에게 바닥도 없고 벽도 없는 배경은 불성실한 마감이나 미완성, 미비한 학습이나 재능의 결핍 외에 다른 것이 아니었으니까.
1865년 8월 1일 마네는 그의 친구이자 후원자인 뒤레와 함께 스페인 프라도미술관을 방문했다. 그리고 그의 삶을 바꿔놓았던 두 그림 가운데 하나인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어릿광대 파블로 데 바야돌리드(1636)’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나머지 한 점은 프란시스코 고야의 ‘1808년 5월 3일’이었다.
그때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깊은 감흥이 존재의 밑에서 올라오는 것이 느껴졌다. 그림 속 인물이 펠리페 4세 시대의 광대라는 사실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마네는 벨라스케스의 회화가 시대를 초월하는 혁신성을 띠는 이유가 인물을 캔버스라는 사각의 인위적인 공간 안에서 제대로 살아 있도록 생명을 부여하는 방식에 있음을 알았다. 마네는 그 그림 앞에서의 감격을 동료 화가 앙리 판탱라투르에게 보낸 편지에 적었다. “‘어릿광대 파블로 데 바야돌리드’야말로 벨라스케스의 그토록 훌륭한 그림들 가운데서도 가장 특별한 작품임이 분명합니다.” 그 이유를 밝히는 것도 잊지 않았다. “배경은 사라지고 그 사람을 둘러싼 공기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는 온통 검은색이지만 살아 있는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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