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역 때요? 서로 데면데면 했죠. 왜 그랬나 몰라요. 하하”
‘골프 여왕’ 박세리에게 현역 시절 안니카 소렌스탐과의 사이가 어땠냐고 물었더니 이렇게 답했다. 그랬던 둘은 최근에는 부쩍 가깝게 지낸다. 둘은 지난 10월 부산 기장군 스톤게이트 컨트리클럽에서 뭉쳤다. 올해 2회째를 맞은 자선 이벤트 대회 ‘Maum(마음) 박세리 월드 매치’를 위해서였다. 그에 며칠 앞서 박세리와 소렌스탐은 충북 청주 세리니티 골프장에도 함께 머물렀다. 그곳에서 주니어 선수들을 위한 ‘박세리 & 안니카 인비테이셔널 아시아’를 열었다.
박세리와 소렌스탐은 현역 시절 필드에서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1994년 LPGA 투어에 데뷔한 소렌스탐은 통산 72승을 비롯해 올해의 선수상과 상금왕을 각각 8회 차지하는 등 ‘골프 여제’로 군림했다. 1998년 미국 무대에 뛰어든 박세리는 LPGA 통산 25승을 거두며 한국 여자골프의 역사를 새롭게 써내려갔다. 박세리는 특히 강심장으로 유명했다. 첫 2차례의 우승을 메이저 대회에서 일궜고, 연장전에서는 6전 6승을 거뒀다. 이러한 성취 덕에 둘은 세계 골프명예의 전당에도 이름을 올렸다.
현역 시절 경쟁자였던 박세리와 소렌스탐은 이제 동반자가 된 듯하다. 지난해부터 주니어 육성과 골프의 저변 확대를 위해서 힘을 합치기로 했다. 그 첫 결과물이 ‘박세리 & 안니카 인비테이셔널 아시아’다. 영국 R&A와 대한골프협회(KGA)가 후원한 이 대회에는 한국 외에도 태국, 중국, 대만, 필리핀, 일본에서 온 유망주들이 참가했다.
박세리와 소렌스탐은 은퇴 후 각자 무대에서 성공적으로 제2의 인생을 펼쳐나가고 있다. 박세리는 사업가이자 방송인으로 성공적으로 변신했다. 활동 영역이나 영향력은 현역 때보다 커졌다. 일반 대중에게는 친근한 ‘리치 언니’가 됐다. 박세리 월드 매치에 소렌스탐을 비롯해 캐리 웹, 로라 데이비스, 미셸 위 등 LPGA 레전드 뿐 아니라 이형택, 박태환, 현정화, 이동국, 진종오, 모태범 등 각 분야의 스포츠 스타들이 대거 나선 건 박세리의 영향력을 보여준다.
대중적인 인기와 함께 몸값도 여전하다. 지난 7월에는 영국 슈퍼카 브랜드 ‘애스턴마틴’의 국내 공식수입원인 애스턴마틴서울이 박세리를 홍보대사로 임명했다. 애스턴마틴은 영화 007 시리즈의 주인공 제임스 본드가 타는 ‘본드카’로도 유명한 브랜드다. 박세리는 유명 의류 브랜드와도 협업할 예정인 것으로 알려졌다.
한동안 평범한 주부로 살던 소렌스탐도 행정가로 변모했다. 2020년 국제골프연맹(IGF) 회장에 선임됐던 소렌스탐은 2년 임기를 마친 뒤 올해 1월부터 다시 새로운 임기를 시작했다. IGF는 올림픽과 패럴림픽, 유스 올림픽 등에서 골프 경기를 주관하고 있는 경기 단체다. 미국골프협회(USGA), R&A, 미국프로골프(PGA) 투어,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 등이 이사회로 참여한다. 소렌스탐은 지난해 12월에는 여성으로는 최초이자 선수 출신으로는 여섯 번째로 골프기자협회(AGW) 부회장이 됐다.
소렌스탐과 박세리는 자신들의 이름을 내건 LPGA 대회도 개최한다. 소렌스탐은 11월 초 미국 플로리다주 벨에어의 펠리컨 골프클럽에서 ‘더 안니카 드리븐 바이 게인브리지 앳 펠리컨’을 열었다.
박세리도 내년 3월 미국 플로리다주에서 총상금 200만 달러가 걸린 ‘박세리 LA 오픈’을 개최한다. 경기 용인에 마련 중인 ‘박세리 R&D 센터’도 조만간 개관할 것으로 알려졌다. 이곳은 골프 대중화와 주니어 선수 육성을 위한 각종 프로그램 개발의 거점 장소로 활용된다는 청사진을 가지고 있다.
치열하게 경쟁했던 두 명의 ‘골프 레전드’가 이제는 여자골프의 미래를 함께 그려가고 있다. 그들의 선한 영향력은 더욱 ‘리치’해졌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