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모두 팬이거나 팬이었다. 누구나 한 번쯤 인생의 어느 시점에 TV프로그램, 영화, 문학작품, 만화, 브랜드, 스포츠팀, 정치인 등에 열성적이었던 시절이 있다. 같은 걸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여 소속감을 공유한 데서 나아가 요즘에는 사회까지 바꾼다. 임영웅, 방탄소년단(BTS)부터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에 이르는 팬덤은 사회를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게도 하지만 불통을 이끄는 지름길이기도 한다.
신간 ‘팬덤의 시대’는 팬덤의 정의부터 사회에 미치는 각종 영향력에 대해 종합적으로 조명하고 있다. 책에 따르면 팬덤 문화는 사람들이 자신이 속한 집단의 고유성을 바탕으로 다른 집단과 구별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비롯된다. 독특한 색상의 옷을 맞춰 입거나 특정 가치관을 옹호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집단의 소속감이 강할수록 그 집단이 최대한 성공하거나 명성을 얻길 원하고 이를 현실화하기 위해 노력한다.
팬덤 문화는 일상생활 속 사람들의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 2005년 랭커스터대 심리학자 마크 레빈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팬들을 대상으로 맨유 셔츠와 라이벌인 리버풀, 상표가 아예 없는 평범한 셔츠를 입은 사람이 넘어졌을 경우 어떻게 반응하는지 실험했다. 그 결과 팬들은 맨유의 옷을 입고 있는 사람을 도와줄 가능성이 다른 경우들에 비해 3배 더 높았다.
팬덤은 한 사람의 인생에 긍정적인 역할도 미친다. 책은 제인 오스틴의 팬을 자처하는 소피 앤드루스를 사례로 설명한다. 소피는 언니·아버지가 모두 중병을 앓고 본인도 건강이 좋지 않았다. 학창시절 친구와 화장, 남학생, 클럽 등에 대한 열정을 공유하지 못했고 잘 어울리지도 못했다. 방황하는 소피에게 힘이 돼 준건 소설 ‘오만과 편견’이었다. 작품 속 여주인공 엘리자베스 베넷을 통해 자신에 대한 믿음, 여성의 역할, 거짓 친구를 피하는 방법 등의 교훈을 얻었기 때문이다. 이후 소피는 제인 오스틴을 좋아하는 다른 팬들과 소통하면서 고통과 고립에서 벗어났다.
팬덤은 사회적으로 긍정적인 영향력을 발휘하기도 한다. 실제로 테일러 스위프트가 2018년 투표를 독려한 이후 24시간 동안 미국 전역에서 유권자 등록 건수가 급증했다. 상당수의 유권자는 스위프트의 팬층인 18~29세였다. 2020년 미니애폴리스에서 경찰의 과잉 진압으로 흑인이 질식사한 후 K팝 팬들이 시위 감시 앱을 차단하고 온라인에서 ‘흑인의 생명도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 운동을 펼치기도 했다.
이와 달리 팬덤이 팬과 사회에 부정적인 영향을 펼치는 경우도 있다. 영웅으로 따랐던 사람이 갑작스럽게 죽으면 그를 따르던 팬들은 큰 충격을 받는다. 팬들은 친한 친구, 가족이 죽은 듯한 상처를 받는다. 아서 코난 도일이 ‘셜록 홈즈’가 죽음을 맞는 마지막 편을 썼다가 2만 명이 넘는 독자들이 항의하고 증오 편지를 보낸 게 대표적이다. 당시 런던 독자들은 슬픔의 표시로 검은 완장을 차고 다니기도 했다. ‘셜록 홈즈’를 따르던 팬들이 그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한 탓이다.
연쇄살인범이나 총기난사범 등 범죄자를 향한 팬덤은 더 심각하다. 책은 이를 ‘다크팬덤’으로 명명하고 1999년 미국 콜로라도주 콜럼바인고등학교에서 학생 12명을 살해한 학생 에릭 해리스, 딜런 클레볼드를 따르는 팬들을 사례로 꼽았다. 팬들은 해리스와 클레볼드를 우상화했다. 관심사로 포장하지만 이들의 팬덤은 또 다른 모방범죄를 일으킬 수 있다는 점에서 위험하다. 이같은 ‘다크팬덤’에 대해 책이 경고하는 이유다.
저자는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진 대상에 끌리는 습성은 숨을 쉬는 것만큼이나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의도나 결과에 상관없이 행동을 이끌어낸다”며 “사람들이 이런 성향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세상은 분명 덜 분열되고 덜 폭력적일 것이지만 그런 세상에는 팬덤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1만 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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