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유럽연합(EU)이 4년 만에 정상회의을 열었지만 이렇다할 성과를 내지 못했다. 양측은 상호 이익을 위한 신뢰 회복과 협력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얼굴을 맞댔지만 회담에서 이견을 좁히는 데 실패했다. 우크라이나 현안을 놓고 내부 균열을 겪고 있는 EU와 서방의 수출 규제 강화에 큰 불만을 갖고 있는 중국의 우선순위가 엇갈린 데다 가장 첨예하게 대립하는 교역 관계에서도 양측 모두 한 발짝도 양보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7일 중국 베이징을 방문한 샤를 미셸 EU 정상회의 상임의장,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과 만나 “중국과 EU는 상호 협력 파트너로서 정치적 신뢰를 지속적으로 강화하고 전략적 합의를 모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미셸 의장 역시 “우리는 중국과 안정적이고 상호 이익이 되는 관계를 추구하는 데 전념하고 있다”며 “투명하고 예측 가능하며 호혜성에 기반을 둔 협력을 원한다”고 화답했다. 현 EU 집행부 수장이 함께 중국을 찾아 대면 회담을 가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러나 회담에서는 양측의 우선순위와 입장 차만 드러났다. 중국 관영 CCTV 등에 따르면 시 주석은 “(양국 관계에서) 모든 종류의 간섭을 없애야 한다”며 “제도가 다르다고 라이벌로 간주해서는 안 되고 경쟁이 있다고 협력을 축소해서는 안 되며 이견이 있다고 서로 대항하면 안 된다”고 말했다. 이는 EU가 미국 등의 대(對)중국 수출 규제에 동참하고 있는 점을 지적한 것으로 풀이된다. 한편 폰데어라이엔 위원장은 “중국은 EU의 가장 중요한 무역 상대국”이라면서도 “분명 해결해야 할 불균형과 차이가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회담 후 “무역이 양측 사이에서 균형을 이뤄야 한다는 데 시 주석과 합의해 기쁘다”면서도 구체적인 합의 사안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양측은 정상회담 시작 전부터 삐걱거렸다. EU 측은 회담을 이틀 앞두고 “장기적인 무역 불균형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며 대중 무역적자 해소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이에 중국은 “EU가 (중국에 대해) 엄격한 첨단 기술 수출 제재를 가하면서 대중 수출을 늘리기를 원하는 것은 논리에 맞지 않다”며 즉각 반발했다. 이에 더해 14~15일(현지 시간) EU 정상회의를 앞두고 헝가리가 우크라이나의 EU 가입 협상 개시 안건에 제동을 걸면서 마음이 급해진 EU 집행부는 방중 일정을 당초 이틀에서 하루로 단축하기도 했다.
이번 회담의 핵심 의제가 될 것으로 전망된 무역 갈등의 경우 양측 모두 강경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는 예정된 결과라는 분석도 나온다.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EU 관계자들은 회담에 앞서 “어떤 공동성명이나 주요 성과물도 없을 것”이라며 기대감을 낮췄다. 지난해 4000억 유로(약 570조 원) 규모의 대중 무역적자를 기록한 EU는 중국 정부의 막대한 보조금이 공정무역을 해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에 EU는 10월 역내 수출된 중국산 전기차에 대한 반(反)보조금 조사에 착수해 결과에 따라 상계관세를 물리겠다고 예고했다. 중국은 이를 ‘노골적인 보호주의적 행동’이라고 비난하며 같은 달 전기차 배터리의 핵심 원료인 흑연에 대한 수출통제를 발표했다. 알리시아 그라시아 에레로 나틱시스 아시아태평양수석연구원은 “자본 유출을 상쇄하기 위해 대규모 무역흑자가 필요한 중국으로서는 대외 정책을 바꿀 가능성이 낮다”며 “EU 역시 같은 문제에서 물러서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양측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 등 국제 현안에 대해서도 이견을 좁히지 못했다. EU 측은 이날 중국이 대러 수출 규제에 협조하며 러시아가 전쟁을 종식하는 데 영향력을 발휘할 것을 촉구했다. 중국은 서방의 규제를 받는 러시아산 원유를 구매하고 군사 장비에 필요한 부품을 공급하는 등의 방식으로 러시아를 지원해왔다. 뉴욕타임스(NYT)는 “EU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장기적으로 미국에 대항할 파트너가 필요한 중국으로서는 러시아를 포기할 가능성이 매우 낮다”고 전했다. 한편 이날 중국 외교부에 따르면 시 주석은 EU와의 정상회담에 이어 12~13일에는 베트남을 찾아 관계 격상 방안을 논의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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