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저 생리 시작했어요! 이번엔 기대해 봐도 되는 거겠죠?”
이른 아침 삼성서울병원 장기이식센터에 한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수화기 너머 떨리는 목소리의 주인공은 올해 1월 자궁이식을 받은 이서경(35·가명) 씨. 수술한 지 정확히 29일째 되던 날이었다. 한달음에 달려온 연구간호사로부터 희소식을 전해들은 박재범 삼성서울병원 이식외과 교수는 “반년 가까이 맺혔던 응어리가 비로소 조금 풀리는 느낌이었다”고 회고했다.
◇누구보다 간절히 ‘출산의 꿈’ 지켜주고파…“자궁이식 첫 도전”
이씨와 박 교수의 인연은 202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씨는 태어날 때부터 자궁과 질이 없거나 발달하지 않는 질환인 ‘MRKH(Mayer-Rokitansky-Küster-Hauser) 증후군’ 환자다. 이름조차 생소한 MRKH 증후군은 난소 기능이 정상적이라 호르몬 등의 영향이 없고 배란도 가능한데 ‘아기집’이 없는 상태로, 대개 청소년기에 생리를 시작하지 않아 병원을 찾았다가 우연히 발견된다. 여성 5000명당 1명 꼴로 발병한다고 알려졌지만 국내에서는 정확한 통계조차 없다. 최근 10년간 질 관련 수술을 받기 위해 병원을 찾았던 환자들의 기록을 토대로 90명 정도라고 추정할 뿐이다.
MRKH 증후군 등 자궁 요인에 의한 불임으로 아이를 간절히 원하는 환자들이 임신과 출산을 시도할 수 있는 방법은 자궁이식이 유일하다. 2000년 사우디아라비아를 시작으로 19개국 27개 센터가 자궁이식을 시도하고 있는데, 2014년 스웨덴에서 자궁이식 후 출산까지 성공한 사례가 처음 나왔다. 국내에서는 출산은커녕 자궁이식 시도 자체가 드물었다. 당시 삼성서울병원은 다학제 자궁이식팀을 꾸려 관련 임상연구를 시작한 지 막 1년을 넘겼다. 장기이식은 의학적으로 가능한지 여부를 떠나 제한이 많다. 자궁이식은 국내에서 전례가 없어 성공을 장담하기 더욱 어려웠다. 미국 베일러 대학병원은 2021년 논문에서 2016~2019년 사이 20명에게 자궁이식을 시도해 14명이 이식에 성공했고, 그 중 11명(79%)이 출산까지 마쳤다고 보고했다. 박 교수는 “해외 기록들을 찾아보니 실패 사례가 전부 시행 초기에 나왔더라”며 “섣부른 시도로 국내 자궁이식의 길이 막히는 건 아닐까 염려되었던 것도 사실”이라고 털어놨다.
◇“누군가는 해야 할 일” 용기 냈지만…실패 맛보고 좌절하기도
의료진으로서 ‘아무도 가본 적 없는 길’을 선택하기란 쉽지 않다. 그는 자궁이식을 희망하는 환자에게서 2017년 면역관용 유도 신장이식을 받았던 여성 환자를 떠올렸다. 면역관용은 면역억제제를 복용하지 않으면서도 이식된 장기가 거부반응을 일으키지 않고 안정된 상태를 유지하는 것을 말한다. 전 세계적으로 가능한 센터를 손에 꼽을 정도로 난이도가 높다. 해당 환자는 자궁선근증으로 조산 위험까지 있었다. “결혼 11년 만에 아이를 가졌다”며 설레하는 모습에 출산에 도전했고, 산부인과·신장내과 등 여러 진료과가 힘을 합쳐 제왕절개를 통해 무사히 아기를 출산했다. 돌이켜 보면 단 한번도 쉬운 도전은 없었다. 하지만 분명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었다.
그렇게 긴 여정이 시작됐다. 법적 자문과 보건복지부 검토, 기관생명윤리위원회(IRB) 심사를 거치며 절차적 정당성을 갖췄고 이식외과·산부인과·영상의학과·병리과·감염내과 의료진과 변호사 등 자궁이식팀 전원이 각자의 분야에 매달려 수술부터 출산까지 모든 과정에 대한 계획을 세웠다. 연구비가 모자라 후원금을 조달하는 등 수 차례 고비를 넘긴 끝에 2022년 7월 환자의 어머니가 기증한 자궁을 이식했다. 그런데 혈전이 생겨 2주 만에 이식한 자궁을 떼어냈다. 박 교수에게는 25년의 임상 경력을 통틀어 가장 참담했던 순간이다. 그는 “환자의 굳은 결심을 보니 절망하고 있을 수 만은 없었다. 동료 의료진들과 전 과정을 다시 꼼꼼히 살폈다”며 “까다로운 조건을 충족하는 뇌사기증자가 6개월 만에 나타난 건 기적이었다”고 말했다. 자궁 재이식은 국내외를 통틀어 첫 시도였다. 두 번째 이식수술 후 생애 첫 월경을 경험한 환자는 10개월째 별다른 거부반응 없이 안정적인 상태를 유지하며 임신을 준비하고 있다. 이식 수술에 앞서 환자의 난소로부터 채취한 난자와 남편의 정자로 수정한 배아로 이식한 자궁에서 착상을 유도하면서 임신 이후 건강한 출산을 위해 제반사항을 점검하는 단계다.
◇ 동 틀 때까지 수술해도 “한 생명 살리면 설렌다”
박 교수는 자궁이식을 통한 출산 과정을 ‘이어달리기’에 비유한다. 본 수술 후 급성기 거부반응 모니터링을 거치며 분기점을 넘었고, 이제 난임전문 산부인과팀이 바통을 이어 받았다. 손에서 바통이 떠났다고 해서 끝은 아니다. 자궁이식팀은 물론 환자와 가족, 다음 순번을 기다리는 이식대기자도 한마음으로 아기를 맞이할 순간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그는 한결 같이 ‘새로운 길’을 향해 걷을 수 있는 동력으로 “기꺼이 도전에 동참해 주는 동료들과 간절하게 도움을 기다리는 환자들”을 꼽았다. 최근에는 최적의 컨디션이 아닌 확장범주 장기기증자의 신장이식을 확대하는 데 힘을 쏟고 있다. 기증자의 나이가 많아 신장 기능이 떨어질 경우 양쪽을 동시에 교체하는 ‘듀얼 신장이식’도 시도한다. 고질적인 기증장기 부족 탓에 하염 없이 대기하는 환자들에게 삶을 연장할 기회를 주고 싶어서다. 장기이식수술은 밤을 꼬박 새우는 경우가 많다. 그는 “새벽녘 수술장을 나설 때면 ‘누군가에게 새 생명을 찾아줬다’는 생각에 아드레날린이 솟구친다”며 “그게 행복 아니겠느냐”고 되물었다. 남들에게 당연한 일을 누리지 못해 절실한 환자들에게 선택권을 제공하는 것, 박 교수가 긴 레이스를 지속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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