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차로 한 시간, 예술인들이 많이 산다는 경기도 파주 해이리 마을. 울퉁불퉁 좁은 길을 들어서면 ‘소소(SOSO)’라고 적힌 2층짜리 건물이 나타난다. 삐그덕 문을 열고 들어가보았다. 문 왼쪽에는 누군가의 서재를 옮겨놓은 듯한 커다란 책장이 있는 깔끔한 사무실이 나타난다. 벽면 가득 수많은 인문학 책이 즐비한 이곳은 사진작가 권도연의 작업실이다.
책으로 가득한 조용한 옛 갤러리…작업실은 사진의 부족함 메우는 공간
“사람들은 어떤 대상을 소유하기 위해 사진을 찍는데, 사진 만으로는 작가의 이야기를 다 전달하는데 한계가 있다고 생각해요."
작가는 ‘책을 많이 읽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이같이 답했다. 사진작가가 ‘사진은 한계가 있는 매체’라고 말한다니, 무척 흥미롭다. 작가는 “사진을 굉장히 좋아하고 사진을 통해서 만나는 사람이 너무 좋다, 하지만 (사람마다 다르지만) 사진 한 장으로는 온전히 나의 얘기를 다 전달하기 어렵다는 생각을 했다”며 “그런 부족함을 메우기 위해 글을 쓴다”고 설명했다.
작가가 머물고 있는 작업실은 오랜 시간 작가와 함께 작업을 진행한 ‘갤러리 소소’의 옛 전시 공간이다. 다른 젊은 작가들이 그렇듯 그 역시 레지던시에서 작가 생활을 시작했다. 미술이 아닌 문학을 전공한 작가는 그곳에서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들과 교류했다. 레지던시 생활이 마무리된 후 갤러리 소소에서 이 공간을 작가의 작업실로 내줬다. 작가는 여느 직장인처럼 아침 9시에 이곳 작업실로 출근해 하루 12시간 이상을 노동한다. 작가란 아무도 시키지 않은 일을 스스로 해내고 만족해야 하는 직업이다. 특정한 소재를 정하고 그 소재에 대한 예술 작업을 하고, 전시를 기획하고, 내 작품의 성장을 지켜보는 일까지 스스로 감내해야 한다. 작가에 따라 다르지만 직장인처럼 정해진 월급이 있는 것도 아니다. 사진작가가 책이 가득한 작업실에 들어와 어떤 생산성 있는 일을 할 수 있다는 걸까. 작가는 “평소에 일상에서 나오는 상상력이 가장 위대하다고 생각한다”며 “촬영을 하는 기간에는 촬영 장소에 가 있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이곳에서 자료를 찾아보고 책을 읽고 내 작품에 대한 글을 쓴다”고 말했다. 그제서야 기자는 작업실을 가득 채운 책의 의미를 이해했다.
실내 작업실은 ‘사유의 공간’, 야생은 ‘실천의 작업실’
사실 사진작가의 작업실은 대개 실외다. (만약 권 작가가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작가’가 아니었다면 이번 인터뷰는 헛걸음이 될 수도 있었다.) 권 작가가 주로 작업하는 곳은 ‘야생’이다. 최근 작가의 주요 관심사는 야생동물. 도시개발로 북한산으로 밀려난 야생의 개들, 올림픽 대교 밑 습지에 살고 있는 삵, 수달, 고양이, 너구리 등이 그의 사진 속 주인공들이다.
작가는 오랜 시간 들개와 야생동물을 관찰해 왔다. 작가의 작품 속에는 주로 흑백 사진으로 된 풍경 속에서 외롭게 서성이는 야생동물의 모습이 담긴다. 지난달 페리지 갤러리에서 막을 내린 전시 ‘반짝반짝’에서는 작가가 직접 올림픽대교 아래에서 만난 야생동물을 담은 작품이 걸려 관심을 끌었다.
야생동물을 발견하고, 사진을 찍어 사람들 앞에 보여주기까지 과정을 궁금해하는 기자에게 작가는 지난해 소백산에 3개월 머물며 한 여우의 행방을 쫓은 이야기를 들려줬다. 우리나라에서 여우는 1970년 대부터 멸종한 것으로 여겨졌다. 여우 멸종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지만 정부 차원에서 진행된 쥐잡기 운동이 주요한 원인으로 꼽힌다. 쥐잡기 운동이 대대적으로 벌어지면서 먹이가 사라져 멸종한 것. 이렇게 국가에 의해서 멸종된 여우를 다시 세상 밖으로 끄집어 낸 주체도 국가다. 2004년 강원도 양구에서 여우의 사체가 발견된 것. 어쩌면 다시 여우가 우리나라에 살 수 있을 것이란 기대가 생겼고, 멸종위기 야생동물을 복원하기 위한 계획을 수립했다. 정부는 지난 2012년 10월 소백산 일대에 멸종위기 1급 동물인 토종 여우 암수 한 쌍을 방사한 것을 시작으로 국립공원연구원에서 복원한 수십 마리의 여우를 순차적으로 방사했다. 그 여우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지난해 여름, 작가는 우연한 기회에 이같은 여우의 이야기를 듣고 무작정 소백산을 찾는다. 3개월간 여우를 기다리던 중 한 마리 여우가 수백km를 걸어 부산 해운대까지 갔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해운대 여우’를 찾아 부산으로 향했다. 도통 모습을 보여주지 않던 ‘해운대 여우’는 모든걸 포기하고 서울로 돌아가려던 날 작가 앞에 나타났다. 올 해 3월 여우는 다시 스스로 소백산으로 돌아오는 길에 폐부종으로 사망했다고 한다. 이 모든 과정을 이야기하던 작가는 기자에게 ‘해운대 여우는 왜 그 먼 길을 다녔을까요’라고 물었다. 인간의 서식지 파괴 때문에 이곳저곳을 떠돌았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작가는 ‘여우는 그저 그 길이 궁금했던 거예요’ 말했다. 여우가 단지 호기심 때문에 그 여행을 시작했다는 것. 여기서 작가는 ‘여우는 과연 그 긴 여정에서 무엇을 보았을까요’라고 다시 묻는다. 실내 작업실의 책과 글이 실외 작업실과 연결돼 거대한 세계를 형성하는 순간이다.
이제 막 페리지 갤러리 전시를 끝낸 작가의 다음 작업 관심은 ‘소백산 여우의 여정’이다. 올 겨울 작가는 여우의 여정을 따라가며 여우가 본 풍경, 여우의 시선에서 느껴진 세상 등을 사진에 담을 계획이다. 여우의 호기심을 따라가는 것. 해운대 여우가 걸어간 길 곳곳이 작가의 작업실이 되는 셈이다.
야생동물은 인간 세계에서 소외된 약자…사진이 그들을 보여줬으면
누구나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시대에 문학을 전공한 사진작가가 특별히 야생동물이라는 소재에 집중하는 이유가 궁금했다. 작가에게 야생동물은 어떤 의미인지 묻자 그는 ‘야생동물은 인간 세계의 소외받는 약자 중 하나’라고 답했다. 기자는 그제야 작가의 ‘실내 작업실’에 가득한 책의 필요성을 이해했다. 이미지로 메시지를 전달하는 직업인 ‘사진작가’에게서 이 정도의 문장이 나오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성찰이 필요할까.
작가는 ‘내 사진을 통해 약자들이 바이러스처럼 우리 사회로 침입했으면 좋겠다’는 의미심장한 말도 남겼다. 포털 사이트에서 야생동물을 검색하면 대개 ‘언론에서 이용하기 좋은 형태의 사진’이 나타난다. 사진은 사실 자극적인 것을 보고 싶어하는 인간의 욕망을 담은 매체다. 작가가 찍는 사진은 사실 그같은 인간의 욕망을 담고 있지는 않다. 작가는 “야생동물은 외국인노동자처럼 소외된 존재”라며 “내 사진이 주류 사회에서 비주류를 보여주며 사람들이 그런 존재에 더 관심을 갖게 하는 역할을 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작가의 바람이 통하고 있는 걸까. 최근 여러 주류 전시기관이 작가의 작품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작가는 최근 진행된 ‘제1회 랄프깁슨 어워드’ 수상자로 선정됐고, 국립현대미술관과 세계적인 사진전문기관 투손 크리에이티브 사진센터(CCP)가 미국 애리조나에서 진행한 ‘기록과 경이: 한국 현대사진’ 전시에 참여하는 12명 작가 중에도 이름을 올렸다.
인터뷰 초반 작가는 ‘사진은 자신의 메시지를 전달하기에 부족한 면이 있다’고 말했지만, 결국 작가가 애정하는 대상은 오롯이 사진인 듯하다. 그는 “사진은 눈으로 보는 노동으로 주변을 더 유심히 보게 하고 주변의 모든 사물과 사람에 애정을 갖게 한다"며 “내 사진을 통해 사회를 변화시킨다기보단, 내 스스로 주변 사람들에게 좀 더 따뜻한 존재가 되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