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자폭탄이 떨어지고) 멀리서 손을 흔들면서 오는 듯한 사람들이 보였는데 피부가 긴 소매처럼 늘어진 거였습니다. 어른과 아이들 전부 화상을 입어서 한번 넘어지면 일어나지 못했어요."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자폭탄 피해자 박남주(90)씨는 이달 3일 일본 히로시마평화기념관에서 한일기자단 교류 사업 프로그램에 참가한 외교부 출입 기자들을 만나 당시 상황을 전했다. 재일동포 2세인 박 씨는 일본에서 태어났고 아버지는 경남 진주 출신이다. 히로시마에 거주하며 2000년대부터 히로시마 원폭 관련 강연을 하고 있다.
박 씨가 피폭을 당한 건 12살 때였다. 히로시마 교외로 향하는 전차에서 여동생, 남동생과 있었다. 원자폭탄이 폭발한 지점에서 약 1.9km 거리였다. 그는 “아침 6시 30분에 B29 폭격기가 날아온다고 해서 공습 경보가 있었다"며 “아침 7시가 조금 지나서 공습경보는 전부 해제됐다”고 회상했다. 이어 “그런데 이후 B29 소리가 들리더니 폭발음이 나고 불기둥이 확 솟아올랐다”며 "어른들은 전차로부터 빨리 나오라 했다”고 전했다. 미군 B29 폭격기는 오전 8시 15분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투하했다. 히로시마 인구 35만여 명 가운데 7만여 명이 즉사하고 같은 해 말까지 7만여 명이 더 사망했다. 민단 등은 이 가운데 2만여 명이 한국인 희생자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날씨가 굉장히 맑았는데 폭발 후 안개가 가득 껴서 얼굴이 하나도 안 보일 정도였어요. 안개가 걷히고 보니 얼굴들은 전부 피투성이었습니다. 죽어가는 사람들의 마지막 말은 ‘뜨겁다, 물 주세요’였습니다." 박 씨는 당시 머리를 다쳐 피가 났지만 큰 상처는 아니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후 유방암과 피부암을 겪었다.
원폭으로 1945년 8월 15일 일왕은 항복을 선언했고 한국은 광복을 맞았다. 박 씨는 “재일동포는 일본인처럼 피난할 곳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핵폭탄 진원지로부터 2km 이내에서 활동해야 해 힘들었다”며 “그 곳에서 해방과 종전을 맞이했지만 조센징이라는 굴욕적 말도 들었다”고 기억했다.
올해 5월 박 씨는 일본 히로시마에서 열린 원폭 피해 동포 간담회에서 윤석열 대통령을 만났다. 현장에서 박 씨는 "재일동포로서 그리고 원폭피해자로서 이런 날을 맞이한 것에 사실은 몇 번이고 눈물이 맺혔다”고 말했다. 윤 대통령은 “대한민국 대통령으로서 늦게 찾아뵙게 돼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린다”며 고개를 숙였다.
한일 정부에 원하는 게 있냐는 질문에 박 씨는 “원폭으로 앓게 된 암과 관련된 지원비는 모두 일본 정부로부터 받고 있고, 일본에 살며 여기 세금을 낸다”며 더 바라는 건 없다고 했다. 또 “민단이 재일동포와 경제인들을 도와줘 민단에 기부도 했었다”며 고마움을 전했다. 박 씨는 한국원폭피해자대책특별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하며 한국에 돌아간 원폭 피해자들의 치료와 보상을 돕기도 했다. 그는 “다시는 핵이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며 계속해서 피폭 증언을 이어가겠다고 말했다.
이날 오전 인터뷰가 진행된 히로시마 평화기념관은 일요일임에도 천 명 이상의 학생 단체 관람객들로 붐볐다. 다수의 가족 단위 관광객들도 눈에 띄었다. 많은 이들이 자료관에 전시된 원폭 투하 당시 사진과 비디오를 보며 눈물을 훔쳤다. 1995년 개관한 자료관은 피폭자의 찢어지고 타버린 옷과 같은 유품들과 피폭된 기와·계단 등을 전시해 원폭 피해의 참상을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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