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개 유럽연합(EU) 회원국들이 코로나19 팬데믹 위기로 중단했던 재정준칙을 재시행하기로 함에 따라 공공지출 감소로 내년 유럽의 경제성장이 둔화할 것으로 예상된다. 일각에서는 경기 둔화를 막기 위해 유럽중앙은행(ECB)이 예상보다 빨리 금리 인하에 돌입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최근 경제학자들의 분석을 인용해 이미 고금리·고물가로 둔화한 유럽의 경제가 재정준칙 부활로 더 큰 타격을 입을 수 있다고 보도했다. 런던경영대학원의 루크레치아 레이클린 교수는 “새 재정준칙의 시행은 이탈리아처럼 부채가 이미 많은 국가에는 나쁜 소식”이라고 지적했다. 공공지출의 증가에도 좀처럼 이탈리아 내 수요가 되살아나지 못하는 상황에서 정부가 재정적자 감축을 위해 지출을 줄이면 소비심리가 더 위축될 수 있다는 것이다. 연방헌법재판소의 위헌 결정으로 예산 대란에 직면했다가 대대적인 정부지출 축소 결의를 통해 이달 가까스로 내년도 예산안에 합의한 독일도 재정준칙 시행으로 경제가 더욱 악화할 것으로 예상된다. 독일의 내년 경제성장률 평균 전망치는 올해 초 1.4%에서 현재 0.4% 미만으로 낮아졌다.
이에 ECB가 다시 ‘경기 부양수’로 등판할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세계 최대 채권 운용사 핌코의 포트폴리오매니저 콘스타닌 베이트는 “ECB가 더 많은 일을 해야 하는 상황에 다시 직면하게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글로벌 신용평가사들은 매파(긴축적 통화정책)적 경향이 강한 ECB가 내년 말쯤이 돼서야 금리를 인하할 것이라고 전망해왔으나 이 시기가 더 앞당겨질 수도 있다.
재시행이 확정된 EU의 재정준칙은 ‘안정‧성장 협약’으로 불린다. 1990년대 그리스 재정위기를 계기로 체결된 마스트리히트 조약에서 파생됐으며 당시 회원국들은 연간 재정적자는 국내총생산(GDP)의 3%, 부채비율은 GDP 대비 60%를 초과하면 안 된다는 규칙을 정했다. 이 규칙은 쭉 유지돼왔으나 2020년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한시적으로 중단됐다. 이후 경기회복을 위해 각국이 지출을 늘리면서 유로존의 GDP 대비 부채비율은 90%까지 높아졌다. 이에 EU 집행위원회가 재정준칙을 재가동하겠다는 방침을 발표했고 이달 20일 부채 감축 강도를 놓고 각을 세워온 독일과 프랑스가 합의함에 따라 EU 회원국들은 2년 만에 재정준칙 개편안을 마련했다.
새 재정준칙에 따르면 EU 집행위는 각국에 GDP의 3% 규모로 재정적자를 줄이도록 4년의 부채 감축 계획 수립 기간을 부여한다. 다만 경제성장을 위한 조치가 동시에 시행될 경우에는 최대 7년간 부채 감축 기간을 연장하며 매년 0.25%포인트씩 줄일 수 있도록 허용했다. 부채비율과 재정적자 관련 목표치는 그대로 유지하되 각국의 경제 사정에 맞게 재량을 부여한 방식이다. GDP 대비 부채비율이 90%를 넘는 국가는 매년 1%포인트씩 줄여야하며 부채비율이 60~90%인 국가는 0.5%포인트씩 감축해야 한다. 새 재정준칙 초안은 내년 6월 유럽의회 선거 전까지 의회의 승인을 얻어야 법적 효력이 생긴다. 이미 각국 정부가 기존 준칙에 따라 내년 예산안을 계획한 상태여서 의회의 승인을 받더라도 실제로는 2025년부터 적용될 것으로 전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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