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정부에서나 공기업은 ‘절대 을’의 위치에 있다. 공기업 수장을 선임할 때나 각종 정책을 추진할 때도 마찬가지다. 기획재정부가 1년에 두 번씩 발표하는 ‘경제정책방향’에 제시된 숫자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각종 정책기금과 공기업 투자다. 공기업들은 공공기관운영위원회의 경영평가에서 나쁜 평가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울며 겨자 먹기로 정부 정책 방향을 따라야만 하는 숙명이다.
2016년 12조원이라는 사상 최고의 영업이익을 거뒀던 한국전력은 문재인 정부 당시 추진된 탈원전 정책으로 졸지에 효자 공기업에서 부채가 200조원에 달하는 낙제 공기업으로 수직낙하했다. 특히 전 세계적으로 상승한 에너지 가격을 전기요금에 반영하지 않는 포퓰리즘 정책은 한전 경영실적에 치명타를 가했다.
최근 윤석열 정부와 보건복지부가 추진 중인 건강보험 정책을 들여다보면 文정부의 기시감이 든다. 복지부는 지난해 10월 ‘필수의료 혁신 전략’을 발표한 후 필수의료 분야에서 건보재정 수가를 인상하기 위한 정책을 속속 내놓고 있다. 건보재정에 필수의료를 강화하기 위한 별도의 ‘혁신 계정’을 신설하겠다는 구상도 밝혔다.
국민을 위한 정책 시행을 위해 건보재정이 활용될 수도 있다. 하지만 오는 4월 총선을 앞두고 건보재정이 선심성 도구로 활용되는 것 같다는 인상도 풍긴다. 정부가 작년 12월 발표한 요양병원 간병비 지원 사업은 올해 진행되는 시범사업에는 240억원 규모의 국고가 투입되지만 2027년 본 사업부터는 건보재정이 활용될 가능성이 크다. 지난주 발표한 지역가입자 재산 건보료 공제 상향·자동차 건보료 폐지도 연간 1조원의 재원이 필요할 것으로 보이나 정부는 “건강보험 지출효율화를 통해 조달할 수 있다”면서도 구체적인 방법은 제시 않고 있다. 게다가 정부는 지난해 9월 국민 경제 부담이 우려된다면 7년 만에 건보료를 동결했다.
국회예산정책처에 따르면 건보재정의 누적 적립금은 지난해 말 기준 25조원에 달하지만 당장 올해부터 증가 폭이 수입을 압도하며 적자로 돌아서고 2028년에는 지급준비금이 소진 될 것으로 전망된다. 물론 예산정책처의 계산에는 의사 숫자 증가에 따른 의료비 지출 증가와 자동차 건보료 폐지 등의 변수도 빠져 있다. 박은철 연세대 예방의학과 교수는 “필수의료 분야에 1조원 정도가 투입될 것이고 많아도 2조원을 넘지 않을 것”이라며 “아직은 누적 적립금이 25조원 쌓여있어서 단기적으로는 문제가 안되겠지만 고령화 가속화에 따라 의료비 지출이 늘고 수입이 줄면 장기적으로 건보재정에 빨간불이 켜질 수 있다”라고 지적했다.
건보재정은 화수분이 아니다. 한전과 같은 사례를 만들지 않으려면 지출과 수입의 균형을 맞추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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