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사람이 승자인 시절은 끝났다. 오늘날의 미국인은 하나같이 패배자다. 최소한 우리는 스스로를 패배자로 여긴다. 최근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미국인들은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그들이 속한 진영이 부당하게 패하거나 차별을 당한다고 믿는다.
유고브는 서베이 참여자들에게 지난 10년 사이 미국이 좌측이나 우측으로 이동했다고 생각하는지 물었다. 응답자들의 반응은 양 갈래로 갈렸다. 응답자들의 의견은 정치적 성향에 따라 뚜렷한 차이를 보였다. 대다수 진보주의자는 미국이 우측으로 움직였다고 주장한 반면 보수주의자는 왼쪽으로 이동 중이라고 대답했다. 이 나라가 항상 자신이 원하는 방향과 정반대로 움직인다는 데는 거의 의견이 일치했다.
좌우를 불문하고 이처럼 많은 미국인이 자신이 지지하는 팀이나 정당이 뒤처지고 있다는 인식을 드러낸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퓨리서치센터는 2022년 서베이 참가자들에게 자신이 지지하는 정당이 승리보다 패배를 더 자주 한다고 생각하는지 물었다. 이에 대해 공화당계 응답자의 81%, 민주당계 응답자의 66%가 ‘그렇다’고 답했다. 하지만 미국의 주요 정당이 단 둘뿐이니 이들의 응답은 산술적 측면에서 전혀 맞지 않는다.
미국 사회의 인종 편견에 관한 설문 조사에서도 이와 비슷한 결과가 나왔다. 예상했던 대로 주요 인종 그룹 가운데 최소한 부분적으로나마 부당하게 차별을 당하고 있다는 반응은 흑인들 사이에서 가장 많았고 아시아인과 백인들 역시 차별로부터 자유롭지 않다는 견해를 밝혔다. 각 종교 집단의 차별 인식도 유사한 패턴을 보였다. 유고브가 실시한 서베이에서 차별을 당한다는 반응은 유대교인들 사이에서 가장 높게 나왔다. 마찬가지로 기독교인들은 기독교 집단이, 무슬림은 이슬람 교인들이 종교로 인해 차별을 경험한다고 주장했다.
어떤 인종 집단이나 종교 단체가 실제로 겪는 특혜 혹은 차별의 정도가 어떻건 그 집단에 속한 사람들은 그들이 명백한 불이익을 당한다고 생각한다. 스스로를 사회적 서열의 아래쪽에 위치한 천덕꾸러기로 치부한다. 한때 이같은 세계관을 거부했던 그룹조차 지금은 ‘불만 문화’에 젖어 있다.
공화당이 허울뿐인 승리를 지겨워한다는 사실을 꿰뚫어본 것이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가장 큰 정치적 통찰력이다. 백인 남성들이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는 트럼프 추종자들은 그들이 가부장적 사회구조와 인종주의의 최대 수혜자라는 지적에 넌더리를 친다. 사실상 그들 또한 힘겨운 도전과 경제적 스트레스에 시달리기 때문에 승자라는 말도 듣기 싫어한다. 그들이 직면한 문제는 그들에게 불리하게 조작된 시스템 탓이기 때문에 이를 바로잡을 누군가 선출해야 한다는 주장이 먹히는 것이다.
이는 유권자들을 움직이기에 더할 나위 없는 전술이지만 허점이 있다. 그중 하나는 상대적 이익을 볼 수 없게 눈을 가리고 사고 기능마저 앗아간다는 점이다. 어떤 식으로든 실존하는 구조적 불이익을 부정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상대적으로 잘사는 사람들에게 “희망조차 가질 수 없을 만큼 어려운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타인의 고통에 대한 이들의 공감 능력을 제한할 뿐 아니라 잘해보려는 의욕마저 꺾는다. 이런 식의 수사는 부족한 공공 자원의 도움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사람보다 사실상 이를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에게 더 많이 나눠주는 행위를 합리화한다. 양당 모두 부유층 퍼주기에 골몰하는 이유일 수 있다.
만일 모두가 패자라면 너나 없이 더 큰 파이를 가질 자격이 있다. 그러나 파이를 그런 식으로 나눌 수는 없다. 이들 모두에게 당신이야말로 진정한 약자라고 말하는 것의 다른 위험은 이들로 하여금 불량하게 행동하도록 만드는 도덕적 면허증을 제공한다는 점이다. 그저 불량하기만 한 게 아니다. 때로는 폭력적이기까지 하다. 만약 상대방이 이미 똑같은 짓을 하고 있다면 당신 역시 거짓말을 하고, 속이고, 훔치고, 민주주의를 파괴해가며 당신의 적으로 간주되는 사람들을 향해 공권력을 무기처럼 휘두르지 못할 이유가 뭔가. 이처럼 굴절된 시각으로 보면 당신은 그저 저들과 동등하게 행동하고 있을 뿐이다.
만약 양 진영 모두가 이런 생각을 갖고 있고 정치인들이 계속 유독한 환상을 부추긴다면 부작용의 위험수위는 급상승한다. 또 한 번의 선거를 향해 나아가는 길목에서 보다 신선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지도자의 자리는 여전히 비어 있다. 이제 미국인들은 사실이 그렇듯 더욱 더 승자처럼 행동해야 한다는 것이 빈자리를 채워줄 그가 전해야 할 메시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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