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R&D 예산 삭감은 초유의 일입니다. 97년 IMF때도 이런 일은 없었습니다.”
지난 29일 성남하이테크밸리에서 만난 중소기업 대표 A씨는 “자신의 회사는 물론 일대 중소기업들이 이번 연구개발(R&D) 예산 삭감의 파고를 견디기 어려울 것”이라는 우려를 내놨다. 차세대 합성수지를 생산하는 B사를 운영 중인 A씨는 30명 남짓한 직원 중 4분의 1 가량이 연구개발 인력이다. 영업조직을 따로 두지 않는다. 오직 기술력을 믿고 산학협력이나 정부과제 등을 수행하고 과업을 통과하면 판로가 자연스레 확보됐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중소벤처기업부로부터 받은 ‘중소기업기술개발사업 협약변경 매뉴얼’을 받아 보고서는 근본적인 고민에 빠졌다. 첫 장 첫머리에 ‘국가연구개발사업 추진방향 및 정부지침 등에 따라 연구협약 당사자간의 원만한 협의를 통한 협약 변경 요청’이라고 적시돼 있다. 연구비 50% 삭감을 전제로 이 문건에서 중소기업의 선택지는 △수용 △중단신청 △기타 등 3가지 항목밖에 없었다. ‘수용’은 정부 지원 예산이 절반이 깎여나가도 사업을 계속하겠다는 사실상의 ‘항복’이다. 중견기업 수준 인건비를 책정해 놓은 A씨로서는 수억 원의 추가 비용을 감수해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A씨는 “수용 시 ‘사업 평가를 안 하겠다’는 당근책이 목에 걸렸다. 거꾸로 생각하면 ‘중단신청’ 시 깐깐한 평가를 진행하겠다는 사실상의 압박으로 해석된다”고 전했다.
올해 정부의 R&D 예산 삭감 후폭풍이 연초부터 경기도 소재 기업 현장에 들이닥치고 있다. 지난해 정부는 올해 국가 R&D 예산을 전년 대비 15%(4조6000억원) 삭감했다. 예산 삭감에 따라 정부부처 과제별, 기관별로 삭감 내역이 줄줄이 통보되면서 현장의 당혹감은 커지고 있다. 특히 국내 전체 중소기업의 약 25%(2022년 기준)가 몰려있는 경기도 내에서 피해 우려가 더 커지고 있다.
업계에 따르면 중소벤처기업부(중기부)는 경기도 소재 중소기업에 지급하던 R&D 예산 지원을 최대 50%씩 일괄 삭감한다고 통보했다. A씨의 업체를 포함해 예산 지원에 맞춰 연구용 장비를 갖추고 인력을 채용한 기업들은 사업비가 반 토막 난다는 소식에 망연자실하고 있다. 삭감 대상에 포함된 중기부 소관 R&D 과제는 4000여 개로 추산된다.
세수감소 등에 따라 정부의 긴축예산 가능성이 제기된 지난해 중순까지만 해도 정부 R&D 예산 삭감을 예상치 못했다. 반세기 동안 이어진 연구개발에 대한 우리나라 정부의 일관된 의지를 믿었기 때문이었다. 실제 R&D 예산이 삭감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도내 소재 소부장(소재·부품·장비) 업체 연구개발 분야 간부로 일한 B씨는 예견된 일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정부 예산이 전년에 비해 기록적으로 깎이더니 결국 지난해 여름을 넘어서도 당초 책정된 예산의 절반밖에 주지 않았다”며 “이전 정부에서는 전략적으로 지원했던 분야인데 갑자기 예산이 줄면서 현장에선 혼란이 이어지고 있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그는 일본 소부장 업체로의 이직을 고민 중이라고 했다.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 상황이지만 기업 관계자들은 이제라도 정부가 현장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주길 당부했다. 아울러 경기도의 역할도 주문했다. A씨는 “중소기업은 국가의 미래이다.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이 정부의 R&D지원”이라며 “R&D 분야는 기본적으로 장기 과제인 만큼 현장에서 희망이 꺾이지 않도록 정부가 다시 숙고해주시길 바란다”고 말했다.
현장에서 만난 또 다른 소재 기업의 대표 C씨는 “예산이 삭감된 만큼 연구과제 목표를 낮춰 주고, 시험평가 결과 제출 기간을 연장해 줄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C씨는 “경기도 차원에서 연구비 지원은 어렵겠지만 기업들이 채용한 연구원들을 계속 유지할 수 있도록 대책을 마련하고, 시험 비용과 특허 비용을 쿠폰이나 바우처 형식으로 지원해주면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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