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식가들의 나라' '미쉐린 가이드의 탄생지'. 프랑스를 떠올리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은 단연 음식이다. 프랑스 미식 신화의 밑바탕에는 유럽 최대 농업국 프랑스의 비옥한 땅이 빚어낸 뛰어난 먹거리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프랑스에서 농민들이 분노에 차 거리로 나섰다. 주 70시간을 일해도 최저임금도 벌지 못한다는 것이 분노의 근본적인 이유다. 수천명의 농민들이 트랙터를 끌고 나와 전국 최대의 농산물 시장의 도로를 봉쇄했다. 깜짝 놀란 프랑스 정부가 1억 5000만 유로(약 2167억 원)의 재정 지원 등 각종 대책을 내놓은 후에야 2주간의 시위는 겨우 막을 내렸지만, 농민들의 분노가 시작된 근본 원인이 해결되지 않은 상황에서 불씨는 여전히 남았다는 분석이다.
2주간 농민 분노…어디서 시작됐나
농민들의 시위가 본격화된 것은 정부가 탄소를 많이 배출하는 농기계용 디젤 연료에 대해 유류세를 인상하는 안을 추진하면서다. 농업 생산 단가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만큼 예민한 문제였다. 농심(農心)이 부글부글 끓는 가운데 소들이 전염병으로 집단 폐사하는 사건도 벌어졌다. 그런데도 정부는 손실 보상에 미적지근한 태도를 보였다. 분노에 기름을 부은 셈이다.
지난달 18일 농민들은 트랙터를 끌고 프랑스 서남부에 위치한 A64 고속도로를 봉쇄했다. 관공서에는 분뇨를 던졌다. 격렬한 시위에 깜짝 놀란 프랑스 정부가 농민 달래기에 나섰다. 갓 취임한 가브리엘 아탈 총리는 26일 직접 프랑스 남부의 한 농장을 찾아 유류세 인상 계획을 철회하겠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오랜 적자에 시달리는 동시에 살충제를 덜 쓰고(프랑스·EU) 경작지를 휴경하라(EU)는 안팎의 규제에 진절머리가 난 성난 농심을 달래기엔 역부족이었다. 이 때가 시위의 확산을 막을 수 있는 첫번째 골든타임이었는데 이를 놓친 것에 대해 영국 일간 더타임스는 "총리가 사용하는 언어가 농촌의 공동체가 좋아하기에는 너무 부유했기 때문"이라고 꼬집었다. 1989년생으로 프랑스 제5공화국 역대 최연소 총리로 취임한 아탈 총리는 실제 영화 제작자의 아들로 태어나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파리 엘리트 학교인 에콜 알사시엔을 거쳐 프랑스 최고 고등교육기관 ‘그랑제콜’ 중 한 곳인 파리 정치대학을 졸업한 엘리트다.
값싼 수입 농산물에 가격 인하 요구 '이중고'
농민들은 유류세 인상안에 왜 이렇게까지 화를 내는 걸까. 무엇보다 농민들의 삶이 고달파졌던 것이 가장 큰 원인으로 지목된다. 프랑스 농민들은 생산가격이 오를 경우 농민들이 시장가격을 유통업체에 제안할 수 있도록 한 ‘에갈림(Egalim)법’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다고 지적해 왔다. 이를 위반하면 법인에 최대 100만 유로(약 14억 원)의 과징금을 부과하는 벌칙 조항이 있지만 대형 유통업체와의 거래 단절이 두려운 농민이나 식품업체들이 고발하기는 어려워 법이 유명무실해졌다.
농산물에 대한 제값을 인정받기 어려운 상황에서 값싼 우크라이나산 농산물이 범람한 것도 농민들의 불만에 불을 지폈다. 여기다 경작지 최소 4% 휴경 의무화 등 EU의 각종 환경규제가 이어지며 분노에 기름을 부었다.
프랑스 농민의 20%를 대표하는 농촌조정조합 소속 농부인 데미안 브루넬(Damien Brunelle)은 “EU는 1만㎡ 규모 땅에 쓰는 17g의 살충제도 못 쓰게 규제를 하고 있다”며 “영국의 농부들은 유럽 연합을 떠났기 때문에 살충제를 사용할 수 있는데 EU는 눈과 귀가 멀었다”며 작심 비판했다.
농민들이 EU와 정부의 각종 규제를 따르면서 농작물을 재배·판매해봐야 이를 지키지 않고 재배된 동유럽산 농수산물이 낮은 관세를 적용받아 수입되고 있어 이를 지키는 보람조차 없다는 것이다. 농민들은 본인들은 주 70시간을 일해도 최저 임금만큼도 건지지 못하고 있다는 불만을 제기해왔다.
EU·정부, 당근 내놨지만…불씨 남아
1일(현지시간) 프랑스 정부가 추가 재정 지원과 규제 완화 대책을 내놓으며 2주간 지속된 농민들의 도로 봉쇄 시위는 다행히 일단락되는 듯 보인다. 아탈 총리는 이날 오후 기자회견을 열어 농민들의 요구 대부분을 들어주기로 했다. 먼저, 유럽연합(EU) 기준보다 과도하게 적용 중인 환경 규제책을 보류하겠다고 밝혔다. 대표적으로 2025년까지 살충제 사용을 50% 줄이는 '에코피토 계획'을 일시 보류하고 새로운 기준을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또 정부는 농가 소득 보장을 위해 에갈림법 적용을 강화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브뤼노 르메르 재정경제부 장관은 "제조업체와 슈퍼마켓 체인 모두를 점검할 예정"이라며 "위반 시 매출액의 2%에 달하는 과징금이 부과될 수 있다"고 말했다.
축산농가 지원을 위한 1억 5000만 유로(약 2167억원)의 재정 지원책도 발표됐다. 정부는 아울러 농민들의 요구 중 하나인 직업적 존중을 위해 "식량 주권의 목표를 법에 명확히 명시하겠다"며 "농업을 근본적인 국익으로 농촌법에 명시하겠다"고 밝혔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도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유럽연합 정상회의 당일 기자회견에서 우크라이나산 농산물에도 관세를 부과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프랑스 뿐 아니라 독일과 벨기에 등 유럽 각국에서 농민 시위가 거세지자 유럽연합(EU)도 부랴부랴 농업 지원 대책을 내놨다. EU 집행위는 유럽 농민들의 불만사항 중 하나인 우크라이나산 농산물 면세 조처와 관련해 대상 품목의 수입량이 지난 2년치 평균을 초과하면 자동으로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밝혔다. 또 환경 보호를 위해 휴경지를 4%로 해야 한다는 의무도 올 한해 한시적으로 면제하는 방안을 추진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실제로 이같은 조치가 현실화할지는 미지수다. EU 전체 27개국의 최종 합의가 있어야 확정되기 때문이다.
주요 농민단체들이 새로운 방식의 투쟁에 나서겠다고 밝히는 등 불씨는 여전히 꺼지지 않은 상황이다. 아르노 루소 전국농민연맹 회장은 "누구도 오늘 밤에 모든 게 끝났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며 "정부의 발표가 가짜인지를 지켜보고 만약 그런 것으로 드러날 경우 그 후폭풍은 엄청날 것"이라고 경고했다.
특히 문제의 발단이 된 우크라이나산 저가 농축산물 수입이 제한되지 않으면 농민들의 불만은 다시금 터져나올 수 있다. 이에 대한 결정권 역시 EU가 갖고 있는 만큼 단기간에 해법을 찾기는 역부족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견해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