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특정 다수의 시민들이 ‘이상동기범죄’의 잠재적 피해자 혹은 실제 피해자가 됐던 지난해, 테러행위를 허위 예고하거나 신고하는 행위로 경찰이 투입돼 정작 치안 서비스를 필요로 하는 시민들이 그것을 누리지 못하는 일이 빈번히 발생했습니다.
매년 40만 건 가까이 발생하는 고소·고발 사건도 마찬가지입니다. 개인이 당한 억울한 일을 수사기관에 알리는 것은 시민의로서의 권리이지만 일선 경찰들이 무분별한 고소·고발에 시간을 보내는 탓에 정작 시급하고 중요한 사건을 살피지 못하는 ‘행정력 낭비’가 발생하기도 하는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서울경제신문이 ‘허위신고’와 ‘무차별 고소·고발’의 실태를 들여다 봤습니다.
허위신고 매년 4000건 이상 발생…불필요한 경찰 투입에 치안 공백은 ‘덤’
2023년 7월 21일 신림역 칼부림 사건으로 1명의 목숨을 앗아가고 3명을 다치게 한 흉악범 조선에게 지난달 31일일 무기징역이 선고됐다. 지난해 8월 3일 경기 성남시 분당구 서현역 인근에서 14명의 사상자를 낸 최원종도 무기징역이 선고됐다.
유독 불특정 다수를 향한 분노가 극에 달했던 지난해, 이를 모방한 범죄를 예고한 수많은 허위신고가 발생했다.
대표적으로 지난해 8월에는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역 인근에서 사람을 죽이겠다는 신고를 접수한 경찰과 소방당국은 총 59명의 대원을 투입해 용의자를 추적하는 한편 혹시 모를 인명피해를 대비했다.
도봉구에서도 지난해 8월 살인사건 신고를 접수한 경찰은 경찰차 9대와 대원 20명을 투입했지만 결국 허위 신고로 나타났다.
이 같은 허위신고는 매년 4000건 이상 발생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경찰청에 따르면 최근 5년 간 발생한 허위신고 수는 2019년 4531건에서 이듬해 4063건을 줄었다가 지속적으로 증가해 2023년 10월 기준 4436건에 달했다.
문제는 이 같은 허위신고로 인해 실제 치안 서비스를 제공 받아야 하는 시민들이 적재적소에 도움을 받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질 우려가 짙다는 것이다.
일어나지도 않을 일에 경찰·소방의 행정력이 투입되는 탓에 정작 실제로 위험에 노출된 피해자들을 구할 ‘골든타임’을 놓칠 수 있기 때문이다.
판 치는 허위신고 범죄…처벌은 ‘글쎄’
경찰청에 따르면 2021년부터 허위신고 처벌비율은 90%가 넘는다. 지난 2013년 경찰이 ‘112 허위신고 근절 종합대책 ’을 시행한 이후 20% 대에 머물렀던 처벌비율이 획기적으로 증가한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 가벼운 처벌에 그쳐 더 엄중한 책임을 부과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현행 경범죄처벌법상 거짓 신고를 할 경우 60만 원 이하의 벌금형, 구류 또는 과료 처벌을 받는다. 악의·상습적 거짓신고의 경우 위계에 의한 공무집행 방해 혐의를 적용받아 보다 무거운 처벌이 가능하지만 대부분 경범처벌에 처해지는 실정이다.
해외 사례를 살펴보면 미국의 경우 경찰특공대가 출동한 허위 테러협박 및 신고를 ‘테러예고’의 중범죄로 간주하고 ‘2급 살인’에 준하는 형량을 부과하고 있다.
영국은 허위 신고자에게 6개월 이하의 징역 또는 900만 원 이하의 벌금을 부과하는 한편 출동 비용을 포함해 민사상 손해배상 청구까지 하고 있다.
무차별 고소·고발…"동료 삶은 계란 하나 먹어도 ‘절도’"
실제 허위신고로 인한 지역경찰의 현장 투입이 문제가 되고 있는 가운데 수사 인력들도 지나친 고소·고발 남발에 행정력 낭비를 호소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서울에서 근무하는 한 경찰관은 “직장에서 삶은 계란 1개 먹었다고 절도죄 고소한 사건을 불송치하는 데까지 골머리를 앓았다"며 “고소를 취하해도 보고서는 최소 15페이지 를 작성하고 고소고발장 접수 이후 사건 기록도 공소시효까지 보존해야 한다”고 토로했다.
조은희 국민의힘 의원실이 경찰청으로부터 확보한 자료에 따르면 최근 5년간 경찰이 접수한 고소·고발 건수는 2019년 42만 12건에서 지속적으로 감소해 지난해 10월 기준 35만 5071건이었다.
감소세인 전체 고소·고발 건수에 반해 경찰이 반려한 건수는 2019년 12만 7958건에서 2023년 10월 기준 6만 8190건으로 감소해 결국 수사에 착수하는 고소·고발 건수의 차이는 크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수사경찰의 인원 수가 대폭 증가한 것이다. 2019년 2만 1137명, 2020년 2만 2478명이었던 수사경찰이 2021년 처음으로 3만 명 대에 진입해 2023년에는 3만 7252명으로 증가했다.
다만 2021년부터 국가수사본부의 신설에 따라 여성청소년수사, 교통수사, 안보기능, 지하철풍속수사 인력도 수사경찰 현원에 포함해 관리하고 있어 실제 증가세는 경찰이 밝힌 수치보다 적을 것으로 보인다.
수사기관의 고소·고발 접수 의무화…'개정 수사준칙'
무분별한 고소·고발 접수에 수사 경찰들이 시름하고 있는 가운데 지난해 11월부터 개정 수사준칙이 시행되면서 고소·고발장 접수가 의무화됐다.
검·경 수사권 조정을 통해 경찰이 고소·고발을 반려할 수 있는 근거 규정이 담긴 범죄수사규칙 50조가 삭제되면서 일선 경찰들의 고민이 더욱 깊어질 것으로 보인다.
개정된 수사준칙에는 △고소·고발사건 수사기한 3개월 명시 △요구·요청 수사기한 3개월 신설 △검사가 직접 보완수사 해야하는 유형 4개 신설 △검사의 재수사 후 송치요구 사유 확대 △재수사 관련 수사 서류 송부 의무 등 내용이 포함됐다.
한편 고소·고발 접수 의무화에 일선 수사 경찰들의 업무가 더욱 과중될 것으로 예상된 상황에서 경찰 당국은 반려 대신 각하 기준을 확대하기로 했다.
지난해 10월 21일 국가경찰위원회는 범죄수사규칙의 고소·고발 반려 사유를 삭제하고 경찰수사규칙의 각하 사유를 추가하기로 의결한 바 있다.
반려는 당초 사건을 접수하지 않고 돌려보내는 절차인 반면 각하는 사건 접수 이후 불송치 한다는 점에서 차이를 가지고 있다. 다만 경찰이 사건을 각하 하더라도 검찰이 사건 기록을 받아 90일 동안 검토하고 재수사를 요구할 수 있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