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에 의한 노인 안락사’라는 섬뜩한 상상을 펼친 일본 영화 ‘플랜 75’가 초고령사회로 진입하는 현실과 맞물려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스크린 속 일본에서는 새로운 제도가 전격 시행된다. 국가 복지 예산을 비롯한 청년층의 부양 부담을 줄이기 위해 75세 이상 빈곤 노인들의 안락사를 정부에서 지원한다는 내용이다. 가족 동의 없이도 신청할 수 있고 신청자에게는 ‘죽기 전 마음껏 쓰라’며 10만 엔(약 90만 원)을 준다. ‘고령자가 죽음을 선택할 권리’를 내세운 정부는 대상 연령을 65세 이상으로 확대한 ‘플랜 65’ 도입도 검토한다. 초고령사회에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목적에서 탄생한 작품은 세계 각국이 맞닥뜨린 노인 빈곤 문제를 정면으로 응시하며 경각심을 안기고 있다.
14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한눈에 보는 연금 2023’ 보고서에 따르면 2020년 기준 OECD 회원국 전체에서 66~75세 인구의 12.5%, 76세 이상 인구의 16.6%가 상대적 소득 빈곤(가처분 가능 소득 중위 50% 미만)에 처해 있다.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다른 나라 대비 월등히 높은 한국의 수치다. 한국의 66세 이상 노인 빈곤율은 40.4%로 회원국 중 1위를 기록했다. 66~75세의 빈곤율은 31.4%, 76세 이상은 52.0%로 집계돼 회원국 평균을 한참 웃돌았다. 이승희 한국개발연구원(KDI) 연구원은 “일반적으로 한 국가의 노인 빈곤율은 전체 인구 빈곤율에 비해 높다는 점을 감안해도 한국의 경우는 이례적”이라며 “심각한 노인 빈곤 문제를 완화하기 위해 다양한 정책들이 도입됐지만 여전히 (수치가) 높은 상태”라고 지적했다. 미국(22.8%), 호주(22.6%), 일본(20.2%) 등은 한국에 비하면 상대적 비율이 낮았으나 이들 국가 역시 빈곤 노인 증가로 의료·복지 비용 부담 증가, 세수 축소, 생산성 저하와 같은 부작용에 직면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영화 속 ‘플랜 75’ 제도의 타깃 고객(?)도 전체 노인들이 아니다. “우리가 겨냥할 대상은 저소득층, 몸이 불편한 분들, 국가가 먹여 살리지 않으면 안 되는 분들입니다.” 영화 ‘10분’ 속 플랜 75 판촉 사원 교육에서 등장하는 대사처럼 초고령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빈곤 노인의 급속한 증가에 있다. 고위층과 중산층, 즉 ‘소비’를 통해 ‘사회에 이바지하는 사람들’은 나라 발전에 필요한 존재들이다. 이른바 ‘엘더노믹스(eldernomics)’로 대표되는 왕성하게 활동하며 돈을 쓰는 노년층이다.
빈곤 노인 문제 해결은 일찌감치 주요 국가의 핵심 의제로 떠올랐다. 독일은 앞서 고령 근로자 채용에 앞장서는 기업에 인센티브를 부여하는 ‘이니셔티브 50+’를 내놓았고 일본은 최근 대기업을 중심으로 정년 연장·폐지, 고령 퇴직자 재고용 등으로 일정 수입이 보장되는 ‘일하는 노년’ 지원에 공을 들이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독특한 고령층의 자산 보유 방식을 고려한 연금제도 개선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민간단체인 룩셈부르크소득연구(LIS)의 고령 가구 자산 보유 비중 분석에 따르면 한국 고령층의 자산 대부분은 유동화가 어려운 부동산(80% 이상)으로 해외 주요 국가와 비교해 비중이 높은 편이다. KDI는 “소득과 자산이 모두 적어 결핍에 있는 취약층에 정부 지원을 집중할 필요가 있다”며 “기초연금에 투입된 많은 재원은 다른 노인복지에 투입해 고령층의 삶의 질을 제고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제안했다.
“오래 사는 것은 수치스러워.” 플랜 75 상담을 받던 할아버지는 허공을 멍하게 바라보며 읊조린다. 노인의 연명 치료도 법으로 금지된 세상. 도로·다리·댐 등 한때 사회의 기반을 다진 ‘청년’이던 노인들은 그렇게 미리 받아둔 ‘안락사의 날’ 다닥다닥 붙은 침대에 누워 눈을 감는다. 일본 고도성장기를 대표하는 배우 바이쇼 지에코가 일자리를 잃고 죽음을 고민하는 78세 할머니로 등장한 점도 영화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에 울림을 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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