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소설은 독자들에게 불친절하게 써보자고 마음을 먹고 썼어요.” (윤흥길 소설가)
‘장마’ ‘완장’ ‘아홉 켤레 구두로 남은 사내’ 등 반 세기 넘게 걸출한 작품을 쓴 소설가 윤흥길(82)이 돌아왔다. 대하 소설이 드문 시대에 1600페이지 분량의 장편 소설 ‘문신(전 5권)’을 완간하면서다.
윤 작가는 27일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제 나이도 많고 앞으로 이런 작품을 쓸 기회도 없을 것”이라며 “독자들에게 친절하게 써보자는 생각에서 벗어나 문장 특색을 살리는 데 집중했다”고 밝혔다.
소설 ‘문신’은 일제강점기를 살아가는 한 가족의 욕망과 엇갈린 신념을 다룬다. 누구보다 먼저 창씨개명을 하고 일제 시대 법의 빈틈을 파고들어 천석꾼이 된 최명배와 아버지 뜻과는 다른 삶을 사는 세 자녀 최부용·귀용·순금의 역동적인 삶이 끊임 없이 겹쳐졌다 갈래가 바뀌는 지류처럼 펼쳐진다. 완간 전인 2020년 제10회 박경리 문학상을 수상한 뒤 ‘21세기의 새로운 고전’, 윤흥길 필생의 역작’ 등 수식어도 따라왔다. 간담회 내내 겸양을 보이던 그는 “‘필생의 역작’이라는 말에는 수긍할 수 있다”며 “내 모든 힘을 기울여서 노력 끝에 낸 작품”이라고 소회를 밝혔다.
‘불친절한 문장’은 우리 민족 특유의 정서를 담는 판소리의 율조를 최대한 느끼게 하기 위해서다. 처음에는 어색할 수 있지만 문장에 익숙해지면 새로운 재미를 느낄 수 있다는 설명이다.
소설 ‘문신’의 모티브는 오래 전부터 작가 안에 있었다. 윤 작가는 “역사적으로 오랜 전통 갖고 있는데 시대가 변하면서 내용은 증발하고 형태만 남아있는 게 있다”며 “어릴 적 6·25 전쟁 때 입영 통지를 받은 동네 형들이 팔뚝이나 어깨에 이름을 새기는 것을 봤다”고 말했다. 어린 시절 호기심으로 남았던 광경이 ‘부병자자(赴兵刺字)’ 풍습이라는 것을 알게 된 건 먼 훗날 ‘한국인의 의식구조’라는 책을 읽으면서다. 제목 '문신'은 전쟁에 나가 죽으면 시신으로라도 고향에 돌아와 묻히고 싶다는 염원으로 몸에 문신을 새기는 '부병자자' 풍습에서 따왔다.
윤 작가는 “살아 돌아오면 다행이고 전쟁터에서 죽더라도 가족들이 시신을 식별해 고향 선산에 묻어주길 바라는 소망이 투영된 것”이라며 “일제강점기,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 역사적 사건 속에서도 그 풍습이 있었다고 추측해 발상을 시작했다”고 전했다.
구상부터 자료 조사, 집필까지 25년이 걸렸다. 윤 작가는 원동력을 두고 어디까지나 생활이 원동력이라면서도 “돌아 보니 안 쓰고는 배기지를 못했다”고 말했다.
한국 문학계의 유행화된 경향성에 대해서는 “어느 날 여름에 거리에 나갔더니 모든 여성들이 새까만 복장을 하고 있어 놀라서 물어보니 검은 옷이 유행이라고 하더라”며 “한 나라의 문단이 ‘한 여름 검은 옷’ 일색처럼 유행이 대세를 이룬다면 불행한 것”이라고 말했다.
윤 작가는 등단 56년차를 맞았다. 비슷하게 등단했던 많은 소설가들이 작고하거나 절필한 가운데 계속해서 소설을 쓸 수 있는 건 체력도 한 몫 한다. 그는 “다른 예술은 접한 게 없지만 기계체조부터 축구, 배구까지 운동을 즐기며 체력을 길렀다”며 “밤낮 바꿔가며 쭉 쓸 수 있는 것도 체력 덕분”이라고 말했다. 야간에 주로 소설을 쓰는 그는 여전히 밤을 새고 하루에 최대 수십 장의 원고를 쓰기도 한다. 그는 “조선 말 무렵을 배경으로 하는 소설을 준비 중”이라며 “젊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소설이 ‘어떤 문제를 다뤄야 하는가’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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