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난 것은 반드시 헤어지기 마련이고, 떠난 것은 반드시 돌아온다'(회자정리 거자필반)는 인연의 순리를 한낱 인간이 거스르기란 너무나 어렵다. 전생에 8000 겁의 인연이 쌓여야 이뤄진다는 부부의 연은 얼마나 깊은 것인가.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는 동양적이면서도 서구적 사고가 가미된 시선을 통해 우리에게 인연이란 무엇인지, 재회와 별리가 어떤 것인지 생각할 기회를 제공한다.
‘패스트 라이브즈’는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해성’(유태오)과 ‘나영’(그레타 리)이 나영의 유학으로 헤어지고, 24년 만에 뉴욕에서 다시 만나 그들의 인연을 되돌아보는 이야기를 그렸다. 영화에는 실제로 어린 시절 한국을 떠나 유학길에 오른 셀린 송 감독의 자전적 이야기가 반영돼 있다. 29일 서울 종로구 삼청동에서 만난 송 감독은 “어느 날 뉴욕에서 한국에서 온 어린 시절 친구와 미국인 남편과 셋이 만나며 그 둘의 다리 역할을 한 적이 있다”며 “나의 과거, 현재, 미래가 모두 함께 있다는 감정을 받고 시나리오를 썼다”고 설명했다.
영화에는 동양적 사상이 충분히 반영돼 있다. 영화를 관통하는 것은 ‘인연’을 토대로 한 불교적 사상이다. 해성과 나영이 12년마다 인연을 이어가는 것도 십이지를 떠올리게 해 지극히 동양적이다. 송 감독은 “한국에서 12년 동안 살면서 인연이라는 말에 익숙했다”며 “인연이란 단어를 알아서 인생이 더 깊어졌다”고 말했다.
영화는 수미상관의 윤회적 구조로 구성됐다. 어린 시절의 자신을 서울에 놓고 떠난 나영처럼, 해성 역시 자신의 일부, 과거에 대한 미련을 24년 만에 뉴욕에 남겨 놓고 떠난다. 해성과 나영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상대방과 자신의 변화를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서로가 깨달음을 얻으며 떠나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불교적 관념을 연상케 한다. 이들의 인연이 다음 생에도 계속된다고 생각하면 미소가 나오면서도 동시에 슬픔에 잠기게 된다. 송 감독은 “해성과 나영, 나영의 남편 아서의 관계는 ‘인연’이라는 말로밖에 설명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35mm 필름으로 촬영된 뉴욕의 질감은 아름답게 구현돼 아련한 느낌을 준다. 곳곳에 배치된 배경과 음악도 거슬리지 않고, 추억을 회상하게 만든다. 서울에서는 반가운 얼굴의 특별 출연도 만날 수 있다.
송 감독은 “이 영화의 감정은 뉴요커 뿐 아니라 전 세계 사람 모두가 느낄 수 있는 보편적 감정”이라며 “이민자가 늘어나며 이민자 얘기도 모두의 이야기가 됐다”고 말했다. 해외 평단과 관객은 동양적 감성과 불교 철학이 가미된 영화의 구조에 깊은 감명을 받겠지만, 인연 등의 관념이 익숙한 국내 관객들은 평범한 로맨스 영화로 느낄 수도 있다. 그레타 리와 유태오의 어색한 한국어 연기와 잘 전달되지 않는 대사도 아쉬움으로 남는다.
11일(현지 시간) 열리는 제96회 아카데미 시상식 작품상과 각본상 후보에 올라 있다. 골든글로브·영국 아카데미 등 전 세계 시상식에서 211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돼 미국감독조합상 감독상 등 73관왕에 올랐다. 6일 개봉. 10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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