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연합(EU)이 최소 15억 유로(약 2조 원)의 보조금을 투입하는 광범위한 방위산업 육성 전략을 처음으로 공개했다. 유럽산 무기를 생산하는 군산 복합체를 구축해 ‘미국에 대한 높은 의존’에서 벗어나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다. 러시아 침략에 대응해 유럽의 자체 방어력을 강화한다는 취지를 내세웠지만 세계 2위의 경제공동체인 EU가 각국의 국방력과 직결되는 ‘방산 연합’을 제안하는 것이 부적절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EU 집행위원회는 5일(현지 시간) 유럽 각국의 국방 조달 예산을 유럽산 무기 구매에 지출하도록 권장하고 이를 통해 유럽 대륙의 방위산업을 활성화하는 내용의 유럽방위산업전략(EDIS)과 이를 이행하기 위한 지원 프로그램인 유럽방산프로그램(EDIP)을 공개했다.
해당 문서에 따르면 EU 집행위는 27개 회원국에 2030년까지 국방 조달 예산의 최소 50%를 EU 내에서 지출할 것을 권장했다. 2035년 목표치는 60%다. 또 2030년까지 EU 역내의 방산 거래 규모를 현재의 15%에서 35%로 늘리자고 제안했다. 회원국들이 자국의 기술 개발에만 집중하지 않도록 신규 구매하는 군사 장비의 40% 이상은 공동구매로 할당하자는 안도 제시했다.
전략을 이행하기 위해 EU는 이미 예산안이 확정된 2025~2027년 15억 유로를 지원하겠다는 입장이다. 유럽 내 방산 스타트업과 중소기업 지원을 위해 신규 기금을 조성하고 무기 공동구매 시 부가가치세 면제 등도 추진한다. 또 현재 무기 혹은 탄약 생산 관련 대출을 금지하고 있는 유럽투자은행(EIB)의 대출 요건도 손봐 방산 기업의 신규 투자를 도울 계획이다.
EU 집행위는 이번 전략이 유럽의 방어 능력을 강화하기 위한 조치라고 강조했다. 티에리 브르통 EU 내수시장 담당 집행위원은 유럽이 ‘실존적 위협’에 직면해 있다며 “우크라이나에 대한 러시아 침략에 대응해 EU는 방어 능력을 강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특히 무기 자급자족이 안 돼 대외 의존도가 80%까지 높아진 것이 위기감을 키웠다는 지적이다. 집행위에 따르면 우크라이나 전쟁 후 지난해 6월까지 EU 국가들은 1000억 유로(약 145조 원) 이상의 방위비를 지출했지만 그중 60%가 미국 방산 업체로 들어갔다. 걸핏하면 서방의 안보 공동체인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에서 탈퇴하겠다고 으름장을 놓는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재선될지 모른다는 우려도 이번 발표에 힘을 실었다는 분석이다.
회원국들의 반응은 다소 엇갈리는 분위기다. EU 집행위 주도로 ‘국방의 통합’을 도모하는 것은 선을 넘은 게 아니냐는 비판도 나온다. 방위산업은 각국의 안보 기밀과 직결되는 특수 분야이기 때문이다. 미 정치 전문 매체 폴리티코는 “EU 집행위의 전략은 금기를 깨는 것”이라고 논평했다. 매체는 한 EU 고위 관계자를 인용해 “회원국들은 자국의 (국방) 역량을 빼앗기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고도 전했다.
거대한 구상에 비해 지원금이 너무 적어 비현실적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이번 전략의 성공 여부는 결국 얼마만큼의 예산을 마련하느냐에 달렸는데 15억 유로는 턱없이 부족하다는 평가다. 폴리티코는 “EU가 경쟁력 있는 방위산업 단지 건설을 진지하게 고려한다면 훨씬 더 많은 자금이 필요하다”고 꼬집었다. 브르통 집행위원도 올 1월 연설에서 방산 업체 인센티브 규모로 “1000억 유로는 필요하다”고 언급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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