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의 의대 정원 확대 방침에 반발해 전공의들이 집단 사직에 나선 지 한 달을 맞았지만 우려했던 의료대란은 나타나지 않았다. 의료 공백을 메우기 위해 끝까지 환자 곁을 지킨 의료진과 상급병원에서 치료를 받지 못한 환자들을 대신 진료한 중형 병원, 정부 방침에 따라 불편을 감수하고 상급병원 방문을 자제한 성숙한 시민 의식 등 삼박자가 맞아떨어진 결과다. 전문가들은 이번 상황을 왜곡된 의료 시스템을 개혁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17일 보건복지부와 의료계에 따르면 이른바 서울 ‘빅5(서울대·서울아산·세브란스·삼성서울·서울성모) 병원’으로 불리는 상급병원의 전반적인 의료 이용은 지난 3주간 큰 변동 없이 유지되고 있다. 상급병원 의사 인력의 37.8%를 차지하는 전공의들이 빠져나가면서 초기에는 수술 건수가 50%로 급감하고 외래 진료가 무기한 연기되는 등 일부 혼란을 겪었지만 현재 중등증 이하의 입원 환자만 40% 감소했고 중환자실 입원 환자는 평상시와 유사한 3000명 내외를 유지하고 있다. 응급 환자를 24시간 진료할 수 있는 응급 의료기관도 전체(408곳)의 98%에 해당하는 399곳이 병상 축소 없이 중증 환자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다.
증상이 경미한 환자들이 외래 진료를 받기 위해 중형 병원으로 발길을 돌리면서 상급병원은 중증·중등증 환자를 중심으로 진료를 보고 종합병원·병원·의원에서는 경증 환자 위주로 진료를 하는 분산 효과가 나타나고 있다. 전공의 없이 전문의 중심으로 주요 인력이 구성된 종합병원에 입원한 환자는 전공의 집단 이탈 이전인 2월 첫 주와 비교해 이달 14일 기준 11% 증가한 것으로 집계됐다.
전문가들은 이번 기회에 상급병원을 전문의 중심 병원으로 전환해 중증·응급 환자 중심으로 운영하도록 하고 전문·공공병원에 대한 지원을 강화하는 등 의료 개혁에 속도를 높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대학병원장을 지낸 한 의료계 원로 인사는 “정부의 의료 시스템 개편은 환자의 생명과 안전 차원에서도 바람직하다”며 “당장 상급병원에 진료를 예약했던 환자들은 불편하겠지만 의료 시스템과 진료 행태가 바뀌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전공의 집단사직의 역설…'빅5 쏠림' 벗어날 단초 찾았다
전공의들의 집단 사직에 따른 의료 공백 사태는 상급병원의 고질적인 문제점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동시에 향후 한국의 의료 시스템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는 계기가 됐다. 한 달간 이어진 전공의들의 집단 사직이 오히려 환자 상태에 따른 대형 상급병원, 지역 종합병원, 동네 병원의 역할 분담의 중요성과 공공병원 강화 등의 필요성을 보여줬다는 평가가 나온다.
17일 보건복지부와 의료계에 따르면 이번 의료 공백 사태는 전공의가 없으면 곧바로 진료 차질을 빚는 상급병원의 민낯을 그대로 드러냈다. 이른바 ‘빅5(서울대·서울아산·세브란스·삼성서울·서울성모) 병원’에서 전공의가 차지하는 비율은 37.8%에 이른다. 서울대병원과 세브란스병원의 경우 전공의 비율이 각각 46.2%, 40.2%에 달한다. 미국과 일본 등 주요국 전공의가 10% 내외라는 점을 고려할 때 심각한 인력 구조 불균형이다.
그동안 상급병원들이 인건비가 싼 전공의들에게 진료의 상당 부분을 담당하게 하면서 ‘피교육생’인 전공의의 역할이 ‘수련’보다는 ‘과중한 업무’에 쏠려 있었다는 평가가 많았다. 이들의 주당 업무 시간은 80시간에 육박한다. 보건 의료 인력 실태 조사에 따르면 2020년 기준으로 전공의인 인턴과 레지던트의 연봉은 각각 6882만 원, 7280만 원으로 전문의 평균 연봉인 2억 3690만 원의 3분의 1에도 못 미친다.
상급병원들이 인건비가 저렴한 전공의에 의존하는 병원 운영 구조를 기본으로 수도권에 무리하게 분원을 확장해온 탓에 상급병원의 빨대 효과는 심각한 상황이었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따르면 지난해 3분기 기준 환자들이 지불한 전체 요양 급여 비용 85조 3556억 원 가운데 상급병원에서만 16조 9568억 원이 지출됐다. 전체 의료기관 가운데 점유율이 19.8%로 역대 최대치다. 상급병원의 의료급여 증가율은 전년 대비 45.81%로 전체 의료기관 평균 증가율 13.39%의 3배를 웃돌았다.
정부가 전공의에 의존하는 상급병원의 인력 구조를 전문의 중심으로 바꾸기로 한 것도 이 때문이다. 정부는 2025년부터 국립대병원과 지역 수련병원을 시작으로 ‘전문의 중심 병원 전환 시범 사업’을 추진하고 전문의 배치 기준을 강화해 전문의 고용 확대를 유도하기로 했다. 이를 위해 의료기관 설립 시 의사 배치 기준을 개정, 전공의를 전문의의 2분의 1로 산정하도록 할 예정이다.
대형 상급병원에 쏠리던 환자들이 지역 종합병원과 병·의원을 찾으면서 그동안 왜곡됐던 의료 시스템이 자연스럽게 정상화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국내 의료 시스템은 크게 동네 병원(1차 병원), 지역 종합병원(2차 병원), 대형 병원(3차 병원) 등 3단계로 나뉜다. 전공의 집단 이탈로 3차 병원인 상급병원은 중증·응급 환자를 담당하고 1·2차 병원인 종합병원, 병·의원 등에서는 경증 환자를 담당하는 의료기관 종별 역할 재정립이 이뤄지고 있다는 평가다. 대학병원장 출신 원로 의사는 “그동안 치료를 받기 위해 전국에서 왔는데 지역에서 치료를 받으면 충분하다”며 “이번 의료 공백 사태로 국민 각 개인의 건강 유지에는 큰 차이가 없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정부는 의료 시스템에서 ‘허리’에 해당하는 전문 병원에 대한 보상을 강화하고 중진료권별로 3~4개 의료기관을 필수의료 특화 2차 병원으로 육성할 계획이다. 정부는 상급병원의 환자를 전원해서 치료할 수 있는 특수·고난도 전문 병원을 특화하고 상급병원 수준의 보상을 받을 수 있도록 조속한 시일 내 제도개선을 검토할 예정이다.
정부가 공공병원에 대한 적극적인 투자를 늘려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공공병원은 코로나19 때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비상 진료에 활용돼 의료 공백을 메우는 효자 역할을 하고 있다. 정부가 이달 13일 공공의료기관 41곳에 948억 원의 예산을 지원하기로 했지만 인건비에 치중돼 있는 만큼 만성적인 적자 구조를 전환할 만한 구체적인 방안이 제시돼야 한다는 지적이다. 신현웅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은 15일 보건복지부 주최로 열린 토론회에서 “국립대병원이 민간 병원과 경쟁하고 같은 역할을 맡는 기존 방식에서 벗어나 국립대병원만이 할 수 있는 특화된 역량을 더욱 강화할 수 있도록 역할을 재정립하는 방향을 수립하는 게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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