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 8년 만에 ‘마이너스 금리’를 해제하며 금융정책 정상화 수순을 밟게 됐지만 진정한 ‘궤도 안착’은 이제부터가 시작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당분간 기존의 금융 완화 기조를 이어간다는 방침이지만 정책 전환을 가능하게 한 임금 인상과 기업 체질 개선에 속도를 냄으로써 일본 경제가 안정 궤도에 진입해야 하는 숙제가 남아 있다.
◇17년 만에 ‘금리 있는 나라’ 됐다=일본은행(BOJ)은 19일 금융정책결정회의에서 △마이너스 금리 정책 해제 △수익률곡선통제(YCC) 철폐 △상장지수펀드(ETF) 매입 종료 등을 골자로 하는 방안을 결정했다. 해당 정책들은 2012년 12월 2차 아베 신조 내각 출범과 함께 ‘아베노믹스’의 하나로 시행된 대규모 금융 완화 방안들이었다. 정부가 개입해 장기 디플레이션에 빠진 경제를 인위적으로 부양하는 것이 핵심이었다.
이번 결정으로 일본 정책 금리는 구로다 하루히코 총재 시절이던 2016년 1월 이후 8년 만에 ‘마이너스’에서 벗어났으며 후쿠이 도시히코 총재 시절이던 2007년 2월 이후 약 17년 만에 금리를 올리게 됐다.
우에다 가즈오 BOJ 총재는 “물가 2% 목표가 지속적·안정적으로 실현해나갈 것을 내다볼 수 있는 상황에 이르렀다고 판단했다”며 “마이너스 금리 등의 틀이 그 역할을 다 했다”고 밝혔다. 실제로 일본정부와 BOJ가 디플레이션 탈출의 전제 조건 중 하나로 ‘물가 상승 2% 목표’를 내건 가운데 물가상승률은 최근 22개월 연속 2%를 넘었다. 또 다른 조건인 임금 인상은 물가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며 실질임금이 22개월 연속 마이너스를 기록했지만 올해 봄철 노사 임금협상(춘투) 1차 집계 결과 5.85%의 인상률로 33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BOJ는 이번 춘투 결과가 마이너스 금리 해제의 가장 중요한 전제 조건이라고 여러 차례 밝혀왔다. BOJ는 이날 회의 결정문에서 “기업 수익은 계속 개선되고 있고 노동 수급은 단단해지고 있다”며 “이러한 상황에서 올해 춘계 노사 교섭에서 현시점의 결과를 보면 지난해에 이어 제대로 된 임금 인상이 실현될 가능성이 높고 기업으로부터의 청취 정보에서도 폭넓은 기업에서 임금 인상 움직임이 계속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고 밝혔다.
◇YCC 철폐해도 국채 매입은 계속한다=BOJ는 장기금리 상승을 억제하기 위해 도입했던 YCC를 철폐하면서도 지금까지와 같은 수준으로 장기 국채 매입은 이어가기로 했다. 장기금리가 급격히 상승할 경우에 대비하기 위해서다. 현재 BOJ의 월간 국채 매입액은 6조 엔 규모다. 우에다 총재는 “미래의 어느 시점에는 매입액을 줄여나간다는 점도 상정하고 싶지만 현재로서는 구체적으로 이야기할 단계가 아니다”라며 말을 아꼈다. “금리 수준은 시장이 결정하는 것”이라는 기본 방침엔 변함이 없다. 다만, 금리가 급격히 상승할 경우 “기동적인 운영” 즉 국채 매입을 통한 개입에 언제든 나서겠다는 게 일본은행의 방침이다.
기존의 국채 매입을 가져가며 완화 기조를 이어가는 데다 금리 인상이 이뤄졌어도 0.1%의 ‘소폭’이라는 지적도 있다. 이는 일본 경제가 오랜 시간 저금리에 익숙해진 만큼 초기 변화로 인한 변동성을 최소화하기 위한 조치로 풀이된다. 우에다 총재도 이 같은 사정을 의식했다고 전하며 “앞으로 경제 물가 전망을 제대로 만들고 그에 따른 적절한 정책금리 수준을 설정하겠다”고 말했다.
◇본격적인 디플레이션 탈출 시동=이날 BOJ 금융정책결정회의에 참석한 9명의 위원 중 마이너스 금리 해제에 찬성한 위원은 7명이다. 나머지 2명은 반대 의견을 던졌다. 반대 의견을 편 두 위원은 중소기업의 임금 인상 여력, 임금과 물가의 선순환 강도를 신중하게 확인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우에다 총재 역시 이날 기자회견에서 “이치상으로는 기조적인 물가 상승률이 아직 2%에 이르지 않았다고 생각한다”며 이번 정책 변경이 본격적인 금융정책 정상화, 디플레이션 탈출을 위한 ‘시동’이라는 점을 시사했다. 인위적인 경제 부양책을 해제, 정상화 궤도에 올린 만큼 임금과 물가 수준의 지속성을 담보하는 일이 관건이라는 것이다.
시장금리 변화로 기업 운영 환경이 변하면서 자연스럽게 혁신 경쟁도 펼쳐질 것으로 점쳐진다. 오오츠키 나나 나고야상대 교수는 “정책금리가 0.1%포인트 상승하면 기업의 차입 금리는 그 이상으로 오른다”며 “이 경우 기업의 투자 활동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있는 만큼 기업들로서는 더욱 경쟁력을 확보해야 할 당위가 생긴다”고 언급했다. 결국 경쟁력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저금리 혜택에 의지하면서 연명했던 기업들이 퇴출되면서 장기적으로 일본 경제 전반의 경쟁력 강화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제국데이터뱅크에 따르면 주력 사업에서 나온 이익으로 차입금 이자를 감당할 수 없는 ‘좀비 기업’은 2022년 기준 25만 1000개사를 기록해 전체 기업의 17.1%를 차지했다.
◇해외자산 청산 없다=금리 인상에도 당분간 완화 기조가 이어질 것으로 전망되면서 일본인들의 ‘해외 자산 회수’ 가능성은 낮다는 분석이다. 여전히 미국과의 금리 차가 커 투심에 별 영향을 주지 못하는 탓이다. 한때 일본의 금리 인상으로 엔 캐리 트레이드(싼 엔화를 빌려 금리가 높은 국가 자산에 투자) 청산 우려가 제기된 바 있다. 일본은 4조 4300억 달러에 달하는 해외 자산을 보유하고 있어 해외 자산을 팔아 본국으로 회수할 경우 글로벌 금융시장에 타격이 불가피하다는 것이었다. 히데오 시모무라 파이브스타자산운용 수석포트폴리오매니저는 “일본의 개인 자금이 해외 채권과 주식으로 많이 유출되고 있다”며 “일본의 금리정책이 종료된다고 해서 이런 추세가 바뀌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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