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가 10억 원이 넘는 코인(가상자산)을 기부받았는데도 원화로 바꾸지 못하는 처지에 놓이자 정부가 국내 대학들의 가상자산 법인 계좌 개설을 허용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나섰다.
19일 관련 부처에 따르면 서울대는 최근 교육부와 금융위원회 산하 금융정보분석원(FIU)에 코인 기부금을 현금화(지급 청구권 행사)할 수 있도록 법인 명의 계좌 개설을 허용해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교육부와 FIU는 몇 차례 회의를 갖고 코인 기부금의 자금 세탁 가능성 검토 작업에 착수했다. FIU는 올 상반기 관련 분석을 마무리 짓고 대학의 코인 법인 계좌 허용 여부를 발표할 계획이다.
앞서 서울대·고려대·서강대·동서대 등 국내 대학 4곳은 2022년 게임회사 위메이드가 자체 발행한 코인 ‘위믹스(WEMIX)’를 각각 10억 원어치씩 기부받았다.
이들 대학은 기부받은 코인을 블록체인 관련 연구와 미래 인재양성을 위해 쓸 계획이었으나 현재까지 코인을 현금으로 바꾸지 못했다. 코인 기부금 회계 처리에 관한 지침이 없는 데다 법인 명의의 실명 계좌 개설 자체가 막혀 있기 때문이다.
코인을 매각해 원화로 바꾸려면 가상자산거래소 실명 계좌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현재 은행들은 국내 법인과 기관에 가상자산거래소 계좌를 발급하지 않고 있다. 법인명으로 개설되는 법인 통장은 실명으로 인정하기 어려운 데다 자금 세탁 위험이 크다는 판단에서다. 현재 특정금융정보법상 법인 계좌 개설을 금지하는 조항이 따로 없는데도 검찰과 국세청 등 일부 정부기관만 범죄수익 현금화를 위한 법인 계좌 개설이 가능한 까닭이다.
서울대는 위메이드와 약속한 보호예수(록업) 기간인 1년이 한참 지나 최근 가치가 크게 올랐는데도 전혀 손 쓸 수 없는 상황이다. 위믹스 가격은 서울대가 기부 받은 2022년 9월 7일 2780원대에서 이날 3950원대로 약 42.0% 올랐다.
교육계와 가상자산 업계는 대학이 코인으로 기부금을 받아 현금화할 수 있는 길이 열리면 출연 규모가 크게 불어날 것으로 전망한다. 가상자산은 국경을 넘나들어 해외 기부자는 물론 코인에 친숙한 2030세대까지 기부자층의 저변을 넓히는 기회가 될 것이라는 관측이다. 코인의 익명성으로 기부 사실을 알리고 싶어하지 않는 선의의 기부자들의 모금 참여가 활발해질 수 있다고도 평가했다.
코인 기부 문화가 활발한 미국에서는 이미 많은 대학들이 자체 가이드라인을 만들어 검증 받은 코인 위주로 기부를 받아 재정을 확충하고 있다. 가상자산 업계의 한 관계자는 “가상자산은 블록체인 기술로 거래 내역이 모두 기록되고 공개되기 때문에 기부금 횡령이나 비자금 등 자금 세탁 위험이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라고 했다.
다만 가상자산 업체들이 이미지 쇄신 목적으로 대학에 부정하게 청탁하는 경우가 많아 신중하게 검토해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코인 사건 전문가인 예자선 변호사는 “가상자산 업체가 직접 발행한 코인을 기부하면 코인 유통량이 늘어 투자자 손해로 이어진다”며 “엄밀히 말하면 ‘기부’라고 칭하기 어려울 뿐더러 코인 업체들이 이미지 세탁을 위해 대학에 기부 명목으로 청탁할 우려가 커 (법인 실명 계좌 허용은) 위험하다”고 덧붙였다.
금융위 관계자는 “관계기관간 협의를 거쳐야 하는 사항으로, 실명계정 발급 허용여부 및 세부내용에 대해서는 결정된 바가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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