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반도체 시장을 호령했던 일본 반도체 기업 엘피다가 2012년 2월 27일 도쿄지방법원에 법정관리를 신청했다.
일본 정부는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라며 2011년 말 공적자금 지원을 중단했고 결국 엘피다는 2013년 미국 마이크론테크놀로지에 합병되는 신세로 전락했다. 한때 글로벌 시장 점유율 20%를 자랑하며 반도체 기업 순위 2위까지 올랐던 엘피다는 허무하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일본 반도체 산업의 임종이었다.
삼성전자와 하이닉스가 빈틈을 파고들었다. 2012년 스마트폰 시대가 열리면서 D램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했고 삼성전자와 하이닉스가 비약적으로 성장하는 발판이 됐다. 자국 기업 경쟁력 상실을 우려한 미국이 일본 기업의 팔목을 비튼 것도 크게 작용했다. 미국은 일본 반도체 기업들이 저가 제품으로 반도체 시장을 교란하고 있다는 이유로 반도체 상계관세를 부과했다. 1985년에는 ‘플라자합의’를 맺고 엔화 가치를 2배로 절상시켜 일본 제품의 수출 경쟁력을 인위적으로 떨어트렸다. 이듬해에는 반도체 협정을 체결해 일본의 반도체 시장 점유율을 제한했다. 미국은 1950년대 냉전 이후 소련과 중국 공산권 경제를 제어하기 위해 일본 경제를 전폭적으로 지원했지만 자국 기업마저 피해를 보자 180도 입장을 바꿔버린 것이다. 일본 반도체 산업의 몰락은 일본 경제가 ‘잃어버린 30년’ 수렁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단초가 됐다.
일본 중앙은행이 이달 19일 금리 인상을 단행했다. 일본이 금리를 올린 것은 2007년 이후 17년 만이고 마이너스(-) 금리에서 벗어난 것은 2016년 이후 8년 만이다. 국채 수익률을 0% 수준으로 유도해온 장단기 금리 조작 정책(YCC)을 철폐했고 상장 투자 신탁, 부동산 투신 등 위험자산 매입도 종료하기로 했다. 경기 부양을 위해 취해온 금융 완화 3대 정책을 동시에 중단하기로 한 것이다. 기자회견을 연 우에다 가즈오 일본은행 총재의 발언에는 부활하는 사무라이 경제에 대한 강한 자신감이 배어 있었다.
일본은 엔화 가치가 속절 없이 떨어지는 굴욕을 참아가면서 수출 기업의 가격 경쟁력을 높였고 막대한 보조금을 들여 반도체 산업을 지원했다. 대만 파운드리(반도체 위탁 생산) 기업 TSMC를 구마모토현에 유치해 ‘다시 반도체’ 기치를 내걸고 있다. 글로벌 자금이 일본을 주시하면서 닛케이지수는 연일 최고를 갈아치우고 있다. 1989년 12월 말 닛케이225 지수가 기록했던 최고치 3만 8915를 훌쩍 넘어 4만 700대를 기록하고 있다.
일본 경제의 부활은 한국 경제에 많은 숙제를 남긴다. 미국과 중국의 무역·통상 갈등으로 우리 기업의 수출 여건이 녹록지 않은 상황에서 일본 기업의 수출 공세는 더욱 거세질 것이 뻔하다. 주력 수출품인 자동차·조선·철강 분야에서의 경쟁은 물론이고 반도체 분야에서도 일본의 추격이 한층 속도를 낼 것으로 보인다.
미국과 유럽연합(EU)이 반도체·전기차 등 첨단 산업을 대상으로 규제 범위를 넓히고 있고 우리 기업의 중국 수출에 대해서도 견제에 나서고 있다. 특히 미국 대선 후보인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은 고율의 관세 부과를 공약으로 내걸고 있다.
진실은 단순하다. ‘하이테크’가 국내 정책이고 대외 정책이다. ‘기업 지원은 특혜고 정경유착’이라는 비뚤어진 이념은 용도 폐기돼야 한다. 4·10 총선이 끝나면 여야는 다시 정책 선명성 경쟁을 펼칠 게 뻔하다. 이번에야말로 ‘내 편’ ‘네 편’ 가르지 않고 내남없이 기업 경쟁력 제고에 한목소리를 내야 한다. 한국 경제가 직면한 문제의 절반은 정치다. 기업을 적대시하거나 멀리하는 정책으로는 ‘죽음의 나선’을 벗어날 수 없다. 일본은 보조금·세제 등 기업 지원을 통해 경쟁력을 높이고 이를 통해 임금을 올리는 정책을 구사하고 있다. 정부 재정을 마구 푸는 것이 아니라 기업을 통한 진정한 의미의 소득 주도 성장이라고 할 수 있다.
30년간 웅크린 일본 경제의 부활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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