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단 45주년을 맞은 김혜순(69·사진) 시인이 시집 ‘날개 환상통’으로 미국 최대 권위의 전미도서비평가협회상을 수상했다. 전미도서비평가협회상 수상은 우리나라 문단에서는 최초다. 번역문학 부문이 별도로 없는 전미도서비평가협회상에서 번역 시집을 수상 대상으로 선정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전미도서비평가협회(NBCC)는 1976년 이래 매년 소설·비소설·전기·자서전·시·비평 등 6개 분야에서 영어로 쓰인 최고의 작품에 상을 수여한다.
21일(현지 시간) NBCC는 미국 뉴욕 뉴스쿨에서 ‘2023 NBCC 어워즈’를 열고 김 시인의 ‘날개 환상통’의 영문 번역 시집인 ‘팬텀 페인 윙스(Phantom Pain Wings)’를 시 부문 수상작으로 발표했다. NBCC의 시 부문 수상위원회 위원장인 레베카 모건 프랭크 작가는 “가부장제와 전쟁 트라우마에 대한 슬픔과 서사가 방대하고 본능적인 복화술로 구현됐다”며 “놀라울 정도로 독창적이고 대담한 작품을 선보였다”고 평가했다. 경쟁작인 ‘모든 영혼들(사스키아 해밀턴)’ ‘무뢰한들의 모임(로메오 오리오건)’ ‘안내 데스크(로빈 시프)’ ‘미세 증거(샤리프 섀너핸)’ 등 4개 후보를 제쳤다. 시 부문 최종 후보작 5개 중 번역본은 김 시인의 ‘날개 환상통’이 유일했다.
‘날개 환상통’은 김 시인의 등단 40주년이던 2019년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된 그의 열세 번째 시집이다. 지난해 5월 미국의 출판사 뉴디렉션퍼블리싱에서 영문 버전으로 출간된 후 현지 평단의 호평을 받았다. 이 시집은 미국 뉴욕타임스가 지난해 말 선정한 ‘올해 최고의 시집 5권’에 포함되면서 특히 주목을 받았다. 지난해 김 시인은 이 시집을 통해 미국 하버드대 도서관이 선정하는 올해의 ‘T S 엘리엇 메모리얼 리더’로 뽑히기도 했다.
미국의 문예·시사지 뉴요커는 김 시인의 ‘날개 환상통’을 소개하며 “디아스포라를 겪고 있는 시인과 예술가를 위해 언어와 글쓰기에 대한 접근법을 구축했다”며 “매우 한국적이면서도 세계를 향해 열린 그의 작품이 번역되기 시작하면서 북미와 유럽 전역에 팬층이 생겨났다”고 짚은 바 있다. 김 시인의 시집 중에는 ‘날개 환상통’ 외에도 ‘죽음의 자서전’ 등 12권이 영어로 번역됐고 프랑스어·독일어·일본어·중국어·스웨덴어·덴마크어·폴란드어 등으로 번역돼 소개된 바 있다.
김 시인은 1979년 문학과지성사에서 발행하는 계간 문예지 ‘문학과지성’에 ‘담배를 피우는 시체’를 발표해 등단했다. 이후 출판사 평민사와 문장의 편집부에서 일했다. 출판사에서 일하면서도 쉬지 않고 시를 썼다. 특히 퇴고를 잘 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퇴고를 통해 얻는 것보다 시의 리듬이 해쳐지는 게 더욱 크다는 생각에서다. 1993년에는 김수영 시인의 시를 주제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서울예대 교수로 부임해 후학을 양성했다. 극작가 이강백 전 서울예대 교수가 그의 배우자다.
김 시인은 시상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제프리 양 뉴디렉션퍼블리싱 편집자는 수상 소감 대독을 통해 “젠더는 명사가 아닌 동사”라며 “또 하나의 여성을 택해줘서 고맙다”고 말했다. 인터뷰를 사양한 김 시인은 출판사를 통해 전한 수상 소감에서 “NBCC에서 시 부문이 생겨난 뒤 번역본 수상이 최초”라며 “아시아 여자에게 상을 준 것이 놀랍고 기쁘다”고 전했다. 김 시인은 특히 여러 차례 번역을 맡아 그의 시를 해외 독자들에게 소개한 오랜 동료인 최돈미 시인에게 감사를 표했다. ‘날개 환상통’을 번역한 한국계 미국인인 최 시인은 김 시인의 전작 시집 ‘불쌍한 사랑 기계’ ‘전 세계의 쓰레기여, 단결하라!’ 등을 영어로 옮긴 바 있다.
NBCC는 1974년 도서평론가들이 주도해 설립한 비영리단체다. 매년 미국 출판계에서 발간된 최고의 책을 선정해 시상한다. 전미도서상의 경우 1950년에 미국 서점과 출판협회 주도로 시작돼 소설·비소설·시·번역문학·아동문학 등 5개 장르에서 최고의 작품을 선정해 수상한다. 지난해 정보라 작가의 장편소설 ‘저주토끼’가 전미도서상 번역문학 부문 후보에 오른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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