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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문화의 산실 '협률사' <인천 톡톡>

음악의 조화를 이룬다는 뜻'의 협률사는 오늘날의 애관극장 전신

인천의 부호 정치국이 설립…서울 협률사(協律社)보다 7년 앞서

1947년 애관극장 전경. 사진제공=인천시




인천 경동의 협률사(協律舍)는 1895년에 문을 열었다. 협률은 ‘음악의 조화를 이룬다는 뜻’으로 오늘날의 공연을 말한다. 1902년 한국최초의 공연장으로 알려진 서울 정동의 협률사(協律社)보다 7년 앞선다.

23일 인천시 역사자료관에 따르면 인천의 협률사는 당시 인천의 부호로 알려진 정치국이라는 사람이 설립했다. 정치국이 인천 개항 다음 해인 1884년 인천에 거주하면서 자수성가해 인천상공회의소 전신인 ‘인천상업회의소’ 부회두(부회장)에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정치국의 행적은 ‘매일신보’ 1916년 4월 27일 인천신사신상에 자세히 나와 있다. 매일신보에는 “정치국은 부산에서 나서 명치 17년(1884년)에 인천으로 와 15년간 객주업에 종사하더니 명치 32년(1899) 자기의 발기로 공동우선주식회사를 창칩하고 사장이 돼 금일까지 현직에 있다”고 소개한다.

정치국에 대한 행적은 고일의 ‘인천석금(1959)’에서도 일부 기술됐다. 고일은 “인천의 부호 정치국은 부산에서 인천으로 이주해 성공한 재산가로 용동에 창고 같은 집을 지었다”고 기록했다. 고일은 항일운동가 이면서 대표적인 향토사학자이자 언론인이다. 본명은 고희선(1903~1975)이다. 고일은 그 창고 같은 집을 최초의 극장 협률사라고 전했으며, 대한민국에서 제일 오래된 극장인 오늘의 ‘애관극장’의 전신이다.



2021년 현재 애관극장 전경. 사진제공=인천시


인천 협률사가 서울 협률사보다 개관 시기가 빨랐다고 할 수 있는 근거는 당시 일본인의 거주 비율을 보면 추정이 가능하다. 서울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이 집단 거류지에 설치한 서울 협률사를 개관한 이듬해의 서울 일본인 인구는 3673명인 반면 인천 일본인은 6433명으로 서울보다 인천이 2760명 더 많다. 게다가 인천 협률사가 설립된 1895년 당시 일본인 거주비율이 인천 4148명, 서울 1939명인 것을 고려하면 인천 협률사 개관이 서울보다 더 빨랐을 것으로 보인다.

이후 협률사는 1912년 축항사로 명칭이 변경됐다. 축항사로 개칭은 ‘육혈포 강도’로 인천공연을 왔던 혁신단의 임성구 제안에 따랐다고 한다. 또 축항사는 1921년 지역 인사 홍사헌이 인수하면서 ‘애관’으로 이름을 바꿨으며 1927년 건물을 신축했다. 이곳에서 극작가 진우촌·함세덕, 연기자 정암, 무대장치가 원우전과 같은 기라성 같은 인천 문화계 인물들이 배출됐다. 협률사는 역사만큼 인천 문화예술의 선구지로서 그 저력으로 보여주는 상징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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