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겨울 어느 날의 기억이다. 그날따라 험했던 등산길이었다. 한참을 말없이 오르는데 발갛게 피어오른 이름 모를 꽃송이에 눈길이 갔다. 얼어붙은 흙길 위에 벌써 봄의 씨앗이 움튼 것일까. 마치 등산객을 응원이라도 하는 듯해 몸도 마음도 상쾌해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겨우 꽃을 피운 꽃송이 위로 고목의 큰 가지가 넘어지려 하고 있었다. 언 땅에서 기특하게 움튼 생명이 걱정돼 얼른 팔을 걷어붙였고 다른 등산객들도 함께 힘을 보태줬다. 여러 명의 손길 덕분에 이제 겨우 빛을 내기 시작한 어린 생명인 꽃 한 송이를 구할 수 있었다.
다행스러운 마음에 손을 툭툭 털며 다시 등산길에 올랐지만 발걸음은 무거웠다. 병무청을 오가는 병역의무자 중에는 오늘 본 들꽃처럼 하루하루를 힘들고 고단하게 살아가는 청년들이 있어서다.
병무청에서 지난해 본인이 아니면 생계를 책임질 사람이 없어 생계 곤란 사유로 병역 감면을 받은 청년의 수는 450여 명에 달한다. 본인도 돌봄을 받아야 할 대상이지만 질병·장애 등을 가진 다른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가족돌봄청년(young carer)이 우리 주변에는 생각보다 많이 있다. 이들은 주위의 도움 없이 오롯이 홀로서기로 사회에 첫발을 내딛게 되기에 그 발걸음은 더욱 무거울 수밖에 없다.
사회적 취약 청년들의 힘겨운 발걸음을 조금이나마 가볍게 해주기 위해 병무청이 함께하고 있다. 우선 기초생활수급자 등 경제적으로 어려운 병역의무자에게 병역판정검사 과정에서 별도의 검사가 필요하면 예산 지원을 통해 전문병원에서 검사를 받을 수 있도록 조치하고 있다.
또 병역 판정 검사 과정에서 요구되는 병무용 진단서와 의무기록지 등의 서류 발급 비용도 국고에서 지원해 경제적 부담을 덜어주고 있다. 위탁 검사는 지난해 총 203건을 의뢰해 5000만여 원을 무상 지원했고 진단서 등의 발급이 필요한 1100명에게는 1400만 원의 예산을 지원했다.
생계가 곤란한 사회복무요원에게는 복무 중에 생계 활동을 할 수 있도록 겸직 허가제를 운영하고 있다. 특히 올해 1월부터는 생계유지 곤란 사유 병역감면제도를 개선해 병역의무자 외에 장애인·영유아 등 보호가 필요한 가족만 있는 경우 신속하게 병역 감면을 처리하고 유관기관 조회로 민원인의 신청 서류를 간소화하는 등 편익을 높이기 위한 노력도 지속하고 있다. 더불어 이러한 제도를 병역 면탈에 악용하는 사례가 없도록 철저히 단속해 성실한 병역의무자들이 상대적인 박탈감을 느끼지 않도록 조치할 방침이다.
지난 주말 등산길은 어느새 자태를 뽐내는 봄꽃들로 가득했다. 화사한 풍광을 보고 있자니 늦겨울 들꽃이 떠올랐다. 얼음이 녹으면 봄이 오듯 소외된 청년들의 내일에도 꽃이 피어나기를 바라며 우리가 마주할 모든 청년의 희망을 진심으로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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