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연합(EU)이 정부 보조금을 받는 ‘저가 중국산’ 제품과의 전쟁에서 첫 승을 거뒀다. 파격적인 가격 경쟁력으로 EU 역내 공공공사에서 입찰을 따냈던 중국 국영기업이 EU의 불공정 경쟁 조사의 압박 속에 계약을 포기한 것이다. EU는 중국 기업들이 막대한 정부 보조금을 등에 업고 자국 시장을 잠식하고 있는 상황에 위기감을 느끼며 지난해 하반기부터 전기차·태양광·풍력 등 산업 분야에서 불공정 경쟁 여부를 본격적으로 들여다보고 있다. 다만 이 같은 EU의 움직임이 중국을 비롯한 역외 기업에 차별적이라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어 무역 분쟁 가능성에 대한 긴장감도 커지고 있다.
26일(현지 시간) EU 집행위원회는 중국의 국영 철도차량 제조사인 중처그룹(CRRC)의 자회사 중처쓰팡이 불가리아 교통부와 맺은 공공조달 입찰 계약을 철회했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EU 집행위는 중처쓰팡이 받았다고 의심되던 정부 보조금과 관련된 조사도 끝낼 방침이다. 지난달 16일 조사를 개시한 후 약 6주 만이다.
앞서 중처쓰팡은 전기 열차 20량을 제조해 15년간 유지·보수하는 불가리아 정부 사업에 대해 6억 1000만 유로의 입찰가를 써내 최저가로 낙찰 받았다. 하지만 이 가격은 스페인 탈고 등 유럽 업체가 제시한 액수의 절반 수준이어서 중국 정부로부터 과도한 보조금을 받은 게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됐다. 이에 EU 집행위는 “내수 시장을 왜곡하는 수준의 역외보조금을 받았다는 충분한 징후가 있다”며 역외보조금규정(FSR) 위반 여부를 조사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지난해 7월 도입된 FSR의 첫 조사 대상이 된 것이다.
FSR은 EU 회원국과 2억 5000만 유로(약 3589억 원)를 초과하는 공공 입찰 계약을 체결한 기업이 최근 3년 이내 제3국에서 최소 400만 유로(약 57억 원)를 보조금 형태로 지원 받은 경우에는 사전에 신고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해당 규정을 위반한 기업은 매출액의 최대 10%까지 과징금을 부과 받게 된다.
해당 규정은 무차별 보조금을 받는 역외기업 탓에 엄격한 규정을 적용 받고 있는 EU 내 기업이 불이익을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 도입됐다. EU와 중국은 독일 등을 중심으로 서로 핵심 수출국의 역할을 하는 등 밀월 관계를 유지해왔지만 최근 중국의 저가 수입품이 역내 핵심 성장 시장을 잠식하는 상황에서 EU 회원국들의 위기감이 고조돼 왔다. 특히 전기차와 태양광, 풍력발전 등과 같은 부분에서 유럽 핵심 기업들의 매출이 잠식되고 해외 경쟁력이 저하되면서 중국 기업의 시장 침투를 막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졌다. 앞서 지난해 9월 EU는 중국산 전기차의 불공정 보조금 조사에 착수한 데 이어 태양광과 풍력터빈, 철강 등에 대해서도 조사를 검토하겠다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 이 중 전기차의 경우 올 하반기 중국산 전기차의 관세 인상(10%→25%)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는 관측이다.
EU는 징벌적 관세나 과징금을 부과하는 조치 외에 유럽산 부품과 원자재를 사용하는 기업을 우대하는 방식으로도 대중국 무역 장벽을 쌓고 있다. 탄소 중립 제품의 역내 생산 제품 비중을 높이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탄소중립산업법(NIZA)’ 초안을 2월 잠정 합의했고 ‘유럽판 인플레이션감축법(IRA)’으로 불리는 핵심원자재법(CRMA)를 3월 공식 채택했다. 다만 일각에서는 이런 조치가 중국 기업들의 반발을 불러 세계무역기구(WTO)에 제소될 가능성도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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